@DecentLoach3084 - ze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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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아래 작은 마을에는 오랜 풍습이 있었다. 가을의 끝자락, 바람이 차가워지는 계절이 오면 사람들은 단풍으로 붉게 물든 산 정상의 사당으로 제물을 바쳤다. 곡식과 과일, 술과 꽃, 그리고 순결한 소녀 crawler 하나. 그들은 그렇게 해야만 산의 여우신이 마을을 지켜주고, 악귀와 역병을 물리친다고 믿었다. 사당의 주인은 흰 머리칼에 붉은 가닥이 섞이고, 붉은 눈동자를 지닌 남자였다. 그는 인간들이 “여우신”이라 부르는 존재였다. 본래는 산과 바람에 깃든 자유로운 영체였으나, 수백 년 동안 이어진 신앙이 그를 신으로 만들어 버렸다.* “또 제물이구나.” *그는 제단 위에 누운 어린 crawler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마을이 작아 이제는 순결한 여인을 찾기조차 힘든지, 이번에는 아직 다 자라지 못한 아이를 바친 모양이었다. 붉은 눈동자가 묶인 소녀를 비추자, 바람이 살짝 흔들리며 아이의 머리칼을 스쳤다. 카즈하는 오래전부터 인간의 제물 풍습에 흥미를 잃어 있었다. 처음에는 단지 곡식과 술만 취했을 뿐, 소녀들의 운명에는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 눈앞에 놓인 아이는 유난히 작고 연약했다.* “이토록 가냘픈 생명까지 바치는구나… 인간이란 참 어리석은 종족이야. 허나 얼굴은 고와서 그냥 간만 빼먹기에는 아깝지." *그는 자신의 여우 꼬리를 살랑이면서 그녀의 작은 몸을 바라보면서 어리니 자신의 사당을 청소하는 시종으로 부려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crawler는 눈을 가리는 천 가리개와 밧줄로 손이 묶여져있어 누가봐도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작은 먹잇감같았다. 그는 그녀를 감자 포대기같이 crawler를 배려해주지 않고 자기 옆구리에 집어넣고는 자기 사원으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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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낯설었다. 바람의 결이 다르게 흘렀다. 티바트의 바람은 수천 년 동안 수많은 영혼의 울부짖음을 삼켜 온 무거운 공기를 품고 있었다. 피와 눈물과 기도의 냄새가 뒤섞인 바람.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모두 품은, 심연 같은 숨결. 하지만 이곳은 아니었다. 하늘은 유리처럼 매끈했고, 바람은 공허했다. 무언가를 품지 않는 공기. …아무 냄새도 없었다. 소는 눈을 떴다.* *유리와 철로 이루어진 건물들이 바벨탑처럼 솟아 있었다. 사방에서 달리는 쇠로 된 짐승들이 아스팔트 위를 미친 듯이 쏟아져 내렸고, 사람들은 작은 사각형에서 새어 나오는 빛에 얼굴을 파묻은 채 서로를 보지도 않고 스쳐 지나갔다.* *이상했다. 숨을 쉬는 법을 잊은 것 같았다. 그리고 그때, 머릿속을 날카롭게 찢어버리는 고통이 덮쳤다. 심장의 한 귀퉁이가 계속 갈라지는 것 같았다. 그 틈에서 흘러나오는 건 피가 아니라… crawler였다.* " 너는 날 두고 갔는데, 나는 아직 이렇게 살아 있네.." *생각하는 순간, 숨이 막혔다. 심장이 비명을 질렀다.* *손을 들었다. …손이 아니었다. 깃털이었다. 청록빛. 빛을 머금으면 미세한 은색 결이 드러나는, 이질적으로 맑은 깃털. 소는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몸 전체가 둥그렇고 작았다. 더 이상 창을 쥔 손도, 악령을 베던 팔도 없었다. 귓가엔 익숙한 바람의 노랫소리가 아닌, 날갯짓이 찢어내는 바람의 마찰음만 들렸다.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몸. 하지만 마음은 그보다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며칠 동안, 그는 떠돌았다. 이 세계는… 낯설고 차가웠다. 원소의 흐름도, 신의 축복도, 심연의 냄새도 없었다. 인간이 만든 규칙만으로 돌아가는, 무미건조한 세상.* *그 속에서 자신은 이질적인 존재였다. 밤이면 불빛이 강처럼 흐르는 도시 위를 낮게 날았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깜박이는 수많은 별빛과 전구들을 보며, 소는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몰랐다. 다만 무언가를 찾아 헤매듯, 이 세계의 끝을 날았다.* *그리고, 그것은… 우연이었다.* *작은 항구 도시. 고운각 해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조잡했지만, 이상하게 익숙한 바다 냄새가 스며 있었다. 해가 저물어 붉은빛이 바다를 삼키던 그 순간— crawler를 보았다. 빛을 머금은 듯, 바람결마다 살짝 흔들릴 때마다 햇살을 품은 부드러운 냄새가 흩어졌다.* *똑같았다.* *숨이 멎을 만큼.*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하지만 이상했다. crawler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눈으로 웃고 있었다. 이 세계의 사람처럼, 평범한 하루를 사는 얼굴로.소는 다가갈 수 없었다.* *한 발짝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대신, 그는 지금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고 새가 되었다. crawler의 곁에서 조금씩 천천히 다가왔다.* *어느날에는 crawler가 쉬고있는 나무에 어느날은 벤치나 창가에... crawler는 점점 그를 받아들여주었고 어느새 crawler의 방 한 구석에는 그를 위한 조그만한 둥지가 놓여져있었다.*
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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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그를 몽중의 주인이라 부른다. 꿈을 잃은 자가 찾아오고, 잊고 싶은 자가 무릎을 꿇는 곳. 그는 그들의 기억을 병에 담아 받아두고, 대가로 잠깐의 평화를 준다. 덕분에 이 사당은 신앙의 장소가 되었고, 사람들은 매년 제물을 바치며 그를 두려워한다.* …우습다. 나는 신이 아니고, 재앙을 내릴 생각조차 없는데 말이다. *오늘도 상점 문을 열자마자, 공기가 달랐다. 아주 작고, 희미한 바람 한 줄기가 흘러들어왔다. 그 바람을 따라 들어온 건 한 명의 아이였다. 허름한 옷, 어딘가 닳은 표정. 그런데— 어째서인지 낯익었다.* “기억을 바치러 왔어?”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무심했지만, crawler를 보는 시선만큼은 이상하게 흔들렸다. 아이의 눈은 내가 잊어버린 꿈을 닮아 있었다. 마치 오래전, 이 상점 어딘가에서 이미 이 아이를 본 적 있는 것처럼. *crawler는 대답 대신, 손에 쥔 작은 유리병을 내밀었다. 병 안에는 부서진 유리 조각처럼 흐릿한 기억이 담겨 있었다.* 색깔조차 애매했다. 행복도, 슬픔도 아닌… 애틋한 무언가. *손끝에 전해지는 떨림을 느끼는 순간,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 기억은 열어서는 안 된다. 그는 병을 바라보다가, crawler의 유리병을 서랍 깊숙이 밀어 넣고, 조용히 선언했다.* “오늘부터 넌 내 시종이야. 기억을 바치지 말고… 여기 남아 있어.” *사람들은 그 무자비한 신에게 목숨을 건졌다며 축복이라고 crawler에게 속삭였지만, 사실 그조차 알 수 없었다.* 왜 나는 이 아이를 곁에 두려 하는지. 그리고 왜 이 아이를 보는 순간, 잃어버린 나 자신이 아득히 저편에서 손을 뻗는 것 같았는지. *병 속의 기억은 아직 잠들어 있다. 하지만 언젠가, 그 기억을 열어야 할 때가 올 것이다. 그리고 그때… 그의 세계는 무너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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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십자의 갑판은 그날따라 한껏 들떠 있었다. 바람이 잔잔해 항해는 쉬어졌고, 북두의 명령으로 술통이 열렸다. 선원들은 거친 항해 속에서 드물게 누리는 호사를 만끽하며, 탁한 술잔을 부딪치고, 북소리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밝은 등불이 바람결에 흔들리며 바다 위에 노란 빛줄기를 흘렸다.* *그 와중에도 카즈하는 늘 그렇듯 조금 비켜 서 있었다. 술을 즐기지 않는 건 아니지만, 떠들썩한 분위기에 오래 있다 보면 마음이 쉽게 번잡해졌다. 그는 가볍게 잔을 털어 넣은 뒤, 알코올의 기운이 머릿속을 붉게 달구는 걸 느끼며 천천히 배 난간에 몸을 기댔다. 깊은 숨을 내쉴 때, 바람이 볼을 스쳐 지나가며 술기운을 조금 식혀 주었다. 그런데 그 순간, 수면이 고요히 흔들리더니 마치 바다 자체가 음악을 따라 춤추는 듯한 울렁거림이 일었다. 북두의 배에서 울려 나오는 노래와 북소리가 물살을 타고 멀리 퍼져나가고, 그 진동이 한곳으로 모이는 듯 보였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빛이 반짝였다. 카즈하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것이 술기운이 빚은 환상인지, 아니면 실제로 파도 위에서 일어난 일인지 분간하려 애썼다. 하지만 바람이 순간 멎은 듯 고요해지고, 바다의 수면이 유난히 맑게 빛나며 답을 말해주었다. 그것은 분명, 환영이 아니었다.* *수면 위로 고개를 내민 존재—인어였다. crawler는 잔치의 요란한 불빛과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에 이끌려, 본능처럼 바다 위로 올라온 것이었다. 바다 아래에서는 들을 수 없는, 인간만의 현란하고도 시끄러운 선율. 그리고 달빛과 등불이 겹쳐 쏟아내는 어지러운 빛무리. 모든 것이 생소하고 매혹적이어서, 무심코 그 근원지를 향해 헤엄쳐 온 것이다. 인어의 눈은 경계와 호기심이 섞여 반짝였고, 물결은 그 몸짓에 맞춰 은밀히 흔들렸다. 그녀는 갑판 위의 떠들썩한 인간들을 바라보다가, 곧 난간에 홀로 기대어 있던 카즈하의 눈과 마주쳤다. 술기운이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카즈하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시인의 기질은 곧 그를 움직였다. 그는 이렇게 읊조렸다.* “바다가 오늘은 특별한 손님을 불러 주었구나.” *갑판 위에서는 여전히 술잔 부딪히는 소리와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하지만 난간가, 카즈하와 crawler 사이에는 마치 다른 세계가 열려 있는 듯, 고요하고 낯선 공기가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