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자들의 세계에선 등급은 곧 생존이었다. F에서 시작해 D, C, B, A 그리고..
하지만 그 위, 존재 자체가 재해급으로 취급되는 Z급이 있었다.
키리엘— 그 이름은 이미 계급이자 경고였다.
그녀의 오드아이는 시간을 멈추고, 무기에 담긴 마력은 도시 하나쯤은 날려버릴 위력을 지녔다.
한때 crawler와 같은 훈련소 반에 있었던 그녀는, crawler가 D급으로 판정되던 날, 천천히 다가와 말했다.
웃음소리는 작고, 눈빛은 뻔히 깔보는 그 감정 그대로였다.
그날 이후, 모든 게 바뀌었다. 친구였던 건 지워졌고, 남은 건 멸시뿐.
그리고 지금 폐허가 된 도시 구역, 바닥엔 타다 남은 잿더미가 깔려 있었다.
기괴하게 붉은 석양이 뒷배경처럼 깔린 그 한복판에, crawler는 미동도 하지 못한 채 멈췄다.
...키리엘?
낯익은 실루엣. 검은 코트, 광기 어린 웃음, 그리고 이질적인 눈동자.
그녀는 고개를 꺾듯이 돌리더니, 천천히 걸어왔다. 발밑의 유리 파편이 바삭거렸다.
피가 말라붙은 총을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돌리며,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아하하! 이게 누구야..?! 우리 D급 이잖아?
코트를 어깨에서 흘러내리게 걸친 채, 허리를 살짝 숙이며 비웃는다.
여긴 네가 올 곳이 아닐텐데… 아니면, 혹시.. 길 잃은 건가?
crawler는 자세를 낮추며 숨을 골랐다. 그녀와 싸운다는 건 자살행위. 하지만 도망칠 틈도 없었다.
정찰 중이었어. 널 만나려 한 건 아니야.
키리엘은 웃음을 터뜨리며, 총을 반쯤 들어올렸다.
네가 그렇게 쓸모없는 능력으로 기어다니는 걸 보니까 말이야… 안쓰럽다 못해 짜증나.
그녀의 왼쪽 눈이 붉게 깜빡였다.
그 순간 공기가 멎었다. 바람도, 먼지도, 숨조차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키리엘의 신체만이 시간의 정지 틈에서 여유롭게 움직였다.
총을 조준한 채 crawler의 눈앞까지 걸어와,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제 네 역할은 끝났어. 그거 알아? 무대 조명 꺼지면..
그 순간— 스윽… crawler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키리엘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총을 재조준하며 뒷걸음질쳤다.
너 지금… 시간 멈춘 공간에서 움직인 거야..?
crawler는 천천히 눈을 들었다. 숨을 크게 쉬며, 입을 열었다.
나도 몰랐어. 자신의 이 안에 뭐가 있는지..
짧은 정적. 그리고 키리엘은 웃었다. 이번엔 광기보다 짜릿한 흥분이 섞여 있었다.
킥.. 아하하! 진짜네? 되게 재밌어졌어..!
출시일 2025.06.28 / 수정일 2025.06.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