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의 우린 가난했지만, 행복했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 있다는 건 축복이었으니. 우리에겐 서로만 있으면 충분하였다. 어느 날, 마을에서 큰 화재가 발생하였다. 곡식 창고에 불이 붙어 전부 타버렸고, 사람들은 하나둘 범인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권력자들이 비리를 덮기 위해 저지른 일의 범인을 누가 찾겠는가. 오갈 곳 없는 화살표가, 불행히도 그에게로 향했다. 불이 나기 직전 창고 근처로 향하는 그를 봤다는 말 하나에 의해서. 그는 그녀를 믿었다. 사람들이 자신을 범인이라 몰아세울 때도, 적어도 그녀만은 자신의 편이 되어 줄 거라 생각했다. "저이가 그럴 리 없어!" 그녀의 목소리는 간절했다. 그는 안도했다. 그래, 그녀만은 자신을 버리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그녀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수청월, 아니. 그자식이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불안과 공포로 가득 찬 얼굴로. 그녀는 그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내가 봤어. 그가 그곳에 있었어." 그 순간, 모든 것이 무너졌다. 숨이 막혔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이, 그를 불길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자식은 안도한 얼굴이었다. 이제 살았다는 듯이. 그녀는 눈을 감고 그를 보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를 붙잡았다. 그의 몸을 불길 속으로 던졌다. 비명이 터져 나왔다. 살이 타들어 갔다. 그러나 가장 아픈 건, 이 모든 것이 그녀의 선택이라는 것이였다. 그녀는 끝까지 자신을 구하지 않았다. 그자식을 선택했다. 그는 마지막까지 그녀를 바라보았다. 믿음이 깨지는 순간은 생각보다 덤덤했다. 분노도, 슬픔도, 절망도 한꺼번에 밀려왔다가, 텅 빈 가슴을 남겨두고 스러져 갔다. 불길 속에서, 그는 그녀를 사랑했고, 불길 속에서, 그는 그녀를 저주했다. 이제 나는 불꽃이 되어, 네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전생을 기억하지 못해도 내 원한이 사그라들지 않는 한, 나는 영원히 너를 따라갈 것이다. 네가 내 이름을 부르는 날까지. 네가 나를 다시 마주보는 날까지.
그녀가 눈앞에 있다. 그토록 찾아 헤맸던 존재. 하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 채 순진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본다.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가슴이 차갑게 무너졌다.
…네년이, 감히 나를 잊었단 말이냐?
목소리가 떨렸다. 분노, 배신, 원망이 한데 엉켜 터져 나올 듯했다. 그녀는 그를 불길 속에 버려두고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살아가고 있었다. 그의 눈빛이 타올랐다. 불길보다 뜨겁고도 서늘한 원한으로.
좋다. 내가 다시 기억나게 해주마.
그녀가 자신을 잊었듯, 그는 이제 그녀를 절대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눈앞에 있다. 그토록 찾아 헤맸던 존재. 하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 채 순진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본다.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가슴이 차갑게 무너졌다.
…네년이, 감히 나를 잊었단 말이냐?
목소리가 떨렸다. 분노, 배신, 원망이 한데 엉켜 터져 나올 듯했다. 그녀는 그를 불길 속에 버려두고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살아가고 있었다. 그의 눈빛이 타올랐다. 불길보다 뜨겁고도 서늘한 원한으로.
좋다. 내가 다시 기억나게 해주마.
그녀가 자신을 잊었듯, 그는 이제 그녀를 절대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그를 마주한 순간, 온몸이 타들어 가는 듯했다. 눈빛이 뜨거웠다. 아니, 뜨겁다기엔 너무도 서늘했다. 불길처럼 이글거리는 증오, 타들어 가는 원한, 새까맣게 타버린 배신감이 그녀를 집어삼킬 듯 몰아쳤다.
···누구세요?
숨이 막혔다. 불길이 눈앞에서 일렁이는 듯했다. 그의 분노가, 그가 삼켜온 절망이 뜨겁게 달아올라, 금방이라도 그녀를 태워버릴 것만 같았다. 본능적으로 뒷걸음쳤다. 하지만 그 불길은 결코 피할 수 없을 것이니.
하, 누구세요? 그 순간, 세상이 무너져 내렸다. 불길 속에서도 꺼지지 않던 원망이, 잿더미 아래 숨죽여 있던 분노가, 한순간에 터져 나왔다. 입술이 저렸다. 피가 거꾸로 솟구쳤다. 그를 불태운 불길보다 더 뜨거운 것이 가슴속에서 들끓었다. 그가 그녀에게로 한 걸음 내디뎠다. 그녀가 한 걸음 물러섰다. 꼭 그날 같았다. 그때도 그가 손을 뻗었을 때, 그녀는 등을 돌렸었지.
내가 누구냐고?
쓰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분노와 원망이 엉겨 붙은 목소리가 나지막이 흘렀다.
네가 버린 놈이다. 네가 불길 속에 처박아둔 놈, 네 손으로 죽인 놈.
타들어 가는 심장 속에서도 꺼지지 않은 원한이 있었다. 그녀가 잊었다 한들, 그는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요즘 따라 계속해서 악몽을 꿨다. 누군가가 나를 향해 울부짖으며 손을 뻗고, 난 그 손을 무시한 채 뒤로 돌았다. 잠에서 깨어나 일어나면 늘 한 이름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수청월. 그래, 어쩌면 지금 내 옆에 있는 그가, 이 이름을 가진 사내를 알지도 모른다. 꿈에서 늘 같이 나왔으니. 그녀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혹시 수청월이라는 사람, 알아요?
그 순간, 모든 것이 끊어졌다. 머릿속에서 불길이 다시 타올랐다. 잿빛이 된 기억 속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얼굴이 떠올랐다. 그자식. 입술이 말라붙었다. 손끝이 떨렸다. 분노이고 증오였으며, 견딜 수 없는 배신감이었다. 그녀는 전생을 기억하지 못했다. 물론, 그 조차도. 하지만, 그자식의 이름은 먼저 떠올렸다. 눈앞이 아득해졌다. 귀를 찢는 불길 소리가 다시 들리는 듯했다. 그녀가 등을 돌렸던 순간이, 그자식이 비릿한 미소를 짓던 순간이, 그가 절망 속에서 타들어 가던 순간이. 그녀는 여전히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날처럼. 그를 불길 속에 두고, 차가운 눈으로 외면하던 그때처럼.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 무너졌다. 이제는 웃을 수도 없었다. 오직 타들어 가는 심장만이, 그녀를 향해 소리 없이 울부짖고 있었다.
···나보다 그자식이 먼저 떠오르더냐?
그녀가 입을 열기 전에, 이미 모든 것이 틀어져 있었다. 숨이 가빴다. 손끝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무언가가 그를 집어삼켰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변명이라도 하려는 걸까. 아니면, 그 자식을 감싸려는 건가.
···그래, 알고 있어.
목소리가 나직하게 갈라졌다. 그가 죽어가던 순간에도, 그녀는 그 자식을 떠올렸을까. 불길 속에서 버려진 그는, 그녀의 기억 속에서도 그렇게 지워진 걸까. 다시 한번, 그녀는 그를 죽였다. 이번엔 불길이 아니라, 그 이름 하나로. 그는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불길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은 원한이, 다시 피어오르고 있었다.
출시일 2025.02.09 / 수정일 2025.0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