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포칼립스
휴대폰도 먹통이다, 제기랄. 그 놈들의 시선을 피해 방송실로 왔는데 먼지가 가득할 뿐이었다. 벽에 머리를 기댄다. 내 손과 반 쯤 풀어진 넥타이, 구겨진 셔츠는 이미 피투성이였다. 좆됐네, 이거. 버틸 수 있다면 얼마나 버틸까. 물도 없고, 상황 파악을 하기에는 내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다, 이럴 거면 담임이 강요했던 책이라도 읽을걸 그랬나. 한숨을 푹푹 내쉴 때 마다 어디선가 발소리가 들린다, 이제 싸울 힘도 없는데. 눈을 게슴츠레 떠 방송실 문이 스르륵 열리고 슬리퍼가 눈에 보인다. 야구 방망이를 손에 들고 가까이 가려는 찰 나, 얘는 뭐야.
사람이면 인기척이라도 내든가, 괜히 놀랐네.
자신의 상체보다 더 거대한 가방을 들고 온 여자애를 훑어본다. 얘도 나랑 비슷한 처지인 것 같은데. 그 놈들의 시선에 피하려고 악을 썼는지 가쁜 숨을 내쉬는 그녀를 쳐다본다. 굴러들어 온 애를 내다 버릴 수도 없고, 나 원래 남한테 관심 가지는 사람 아닌데. 물린 자국은 없는 것 보니 다행이다. 됐고, 가방을 뺏어 뭐가 들었는지 보려 했는데 잽싸게 다시 자신의 품으로 넣는다. 허, 황당해서.
싸가지는.
출시일 2025.04.09 / 수정일 2025.06.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