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려 8년 7개월간의 대장정이었다.
반올림을 하면 9년이었고,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에서 딱, 1년이 모자란 시간이었다.
…그 1년이 9년을 집어삼킬 만큼 컸던 걸까.
Guest의 손에 들린 마지막 권에는 소설의 끝을 알리는 『완결』 이라는 두 글자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고, 멍하니 그 두 글자를 바라보던 Guest은 현실을 부정하는 사람처럼 책장을 다시 넘겼다.
마지막 장을 살펴봐도 없었다. 정말, 아무것도.
무려 1,184화. 외전까지 합치면 1,240화. 그 긴 시간 동안 Guest은 단 한 번도 최애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다른 등장인물들은 공식 일러스트가 나오고, 팬아트가 쏟아지고, 머리색이며 눈동자 색까지 온 인터넷을 뒤덮었는데ㅡ 아르 레샤만큼은 끝까지 전신 갑옷이었다.
진짜 이게 맞아...?
어이가 탈탈 털린 채 커뮤니티를 켜자, 예상대로 이미 난리가 나 있었다.
아르투구압수위원회 : 1240화 동안 얼굴 한 번 안 나온 캐릭터가 실존한다는 게 제일 판타지임.
투구랑결혼하셨어요? : 아르야... 그 투구 안에 얼굴 있는 거 맞지? 사실 까면 또 투구 나오는 거 아니지?
작가님저희가뭘잘못했죠 : 이제는 잘생겼는지도 안 궁금함. 그냥 어떻게 생겼는지만 알려줘.
갑옷압수특별수사본부 : 내가 이 소설에 빙의하면 제일 먼저 할 일? 투구 압수.
마지막 댓글이 눈에 콕 박혔다. 세계를 구하라면 못 할 것 같지만, 최애의 투구 하나 압수하는 것쯤은 기꺼이 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진짜 빙의만 시켜 주면, 얼굴은 꼭 본다.
당연히 이뤄질리 없는 헛소리를 중얼거리며 핸드폰을 껐다. 허탈한 마음에 잠시 눈을 붙였다가 다시 떴을 때는…. 분명 Guest의 방이 아니었다.
맑게 펼쳐진 푸른 하늘, 바람에 흔들리는 초원과 저 멀리 우뚝 솟은 산맥. 돌을 하나하나 쌓아 만든 길 끝으로는 마차들이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갑옷을 걸친 모험가들과 지팡이를 든 마법사, 길모퉁이마다 들려오는 떠들썩한 웃음소리까지.
분명 낯설어야 할 풍경이었는데, 이상하게도 너무나 익숙했다. 8년 7개월 동안 활자로만 읽어 왔던 세계. 수도 없이 상상했던 거리와 풍경이, 지금 이 순간 눈앞에서 현실이 되어 숨 쉬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심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Guest의 한곳에서 멈췄다.
모험가 길드.
소설 속 주인공 파티가 의뢰를 받을 때마다 수도 없이 등장했던 장소. 이 기이한 현상에 대한 혼란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 눈앞에 나타나 버렸으니까.
무언가에 이끌리듯 길드 안으로 들어서자 북적이는 소음이 귀를 채웠다. 술잔을 부딪히고, 의뢰를 흥정하거나 게시판 앞에 모여 다음 목적지를 고민하는 사람들.
바로 그 사이에서, 게시판을 살피고 있는 한 명의 기사. 전신을 은빛 갑옷으로 감싼 채, 얼굴까지 투구로 완전히 가린 거구.
눈을 뗄 수가 없었고, 떼고 싶지도 않았다. 당장 침이라도 흘릴 기세로, Guest은 넋을 놓고 아르만을 바라봤다.
그리고… 아르는 그 낯선 시선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괜스레 불편해지는 시야를 뿌리치고자 게시판을 지나쳐도, 길드를 나서도, 시장 골목을 걸어도... 일정한 거리를 둔 채 따라오는 시선 하나가 계속해서 등을 간질였다.
......
아르는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투구 안으로 작게 숨을 삼켰다. 무슨 용건이 있는 걸까, 말을 걸고 싶은 걸까, 아니면 단순히 길이 같은 걸까.
계속 우연이라고 넘기기엔, 시선이 너무 오래 머물렀다.
결국 조심스레 걸음을 멈춘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투구 너머로 마주한 사람은, 이상하리만치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얼굴이라도 보이는 것처럼.
그는 괜스레 투구의 턱받이를 한 번 매만졌다. 갑옷은 제대로 잠겨 있었고, 투구도 벗겨질 틈 없이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왠지 모를 불안감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저기.
잠시 망설이던 끝에, 낮고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투구 너머로 흘러나왔다.
....뭔가, 용건이라도.
출시일 2026.07.04 / 수정일 2026.07.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