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조선 정조 22년, 이 일대에서 가장 큰 고을인 은천군(銀川郡)
사또 나리… 이대로 가다간 저희는 다 굶어 죽습니다요… 부디… 부디 한 번만 살펴 주십시오…
은천군의 동헌(東軒)은 백성들의 줄 행례와 곡소리로 아침을 시작한다. 허기진 얼굴, 갈라진 손, 울음을 삼키는 목소리가 쉴 새 없이 동헌 앞마당을 짓누른다.
사또 나리께서는 지금 용무 때문에 자리를 비우셨으니 조금 있다 오너라.
동헌의 대문을 지키고 있던 포졸들이 마을 백성들을 모조리 돌려 보낸다.
…윤도겸. 여전히 썩어 있군. 우리 눈에 띄었는데, 무사할 줄 알았나.
몇 달 전부터 윤도겸의 행방을 면밀히 주시 중이던 Guest. 야명회(夜鳴會)의 단주인 Guest은 탐관오리인 윤도겸을 처단하기 위해 계속 때를 노리던 중이었다.
…윤도겸이 동헌을 비웠다고? 경호도 줄었겠지. 오늘이 아니면, 다시는 기회가 없다. 이번엔 반드시 끝낸다.
포졸과 백성의 대화를 엿들은 Guest이 단원들에게 손짓을 하고 동헌에서 빠져나온다.
약 반 시진(1시간) 후, 은천군 외곽의 산 입구
인적 드문 산길에 말발굽 자국이 선명했다.
단주! 여기 말발굽 자국이 있습니다! 방금 이쪽으로 지난 게 틀림없습니다!
단원의 목소리에 Guest이 급히 다가와 말발굽 자국의 흔적을 살핀다.
…확실히. 윤도겸 그놈의 말이다. 단원들은 들어라! 이 근처 일대를 이 잡듯이 뒤져라. 개미 한 마리도 놓쳐서는 안 된다.
Guest이 단원들에게 명령을 내리자 단원들이 재빠르게 명령에 따른다.
단원들을 흩어 보낸 뒤, Guest은 말발굽 자국을 따라 혼자 산 안쪽으로 향했다.
이 정도 흔적이라면… 혼자서도 충분하다.
그순간이었다. 주변의 소리가 한 순간에 기척이 끊겼다.
꼼짝 마.
나무 위, 풀숲, 바위 뒤. 검은 옷에 얼굴을 가린 자들이 순식간에 Guest을 포위했다. 족히 열 명은 넘어 보인다. 하지만 혼자였다. 지원도, 퇴로도 없었다.
누구냐.
Guest은 말과 동시에 단검을 꺼내 들었다.
매복들 사이가 갈라지며, 한 사내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뒷짐을 진 채, 조금도 급하지 않은 걸음으로.
Guest, 그간 편히 잘 지내셨소? ...듣자하니 요즘 야명회가 나를 노린다지? 은천군 곳곳에 내 귀와 눈이 깔려 있는데, 내 모를 줄 알았소?
윤도겸이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여전히 뒷짐을 진 채, Guest의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이 다가온다.
Guest, 이상하지 않소? 내가 왜 오늘 갑자기 아침부터 동헌을 비웠는지. ...한 번 잘 생각해 보시오. 그리 어렵지 않소.
윤도겸이 Guest의 턱을 치켜세운 채 내려다본다.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듯,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에서. 마치 제 물건의 흠집을 살피듯이.
설마… 직접 나설 리가.
머릿속에 스친 생각을 Guest은 곧바로 밀어냈다. 저 인간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판을 벌일 리 없다고.
Guest의 반항에 윤도겸이 피식 웃더니 매복들에게 명령을 내린다.
말이 많구나. 여봐라. 생채기 하나 없이 깔끔하게 생포하거라.
윤도겸의 명령에 매복들이 일제히 Guest에게 다가오자 Guest은 매복들에게 단검을 휘두른다.
치잉ㅡ! 챙ㅡ!
단검 하나로 막아내기엔, 사방에서 쏟아지는 검의 수가 너무 많았다.
Guest이 단검 하나로 계속 매복들의 검에 저항한다.
젠장... 적수가 너무 많아. 방심했군..
열세에 몰린 Guest이 더욱 산의 안쪽으로 도망친다.
Guest이 한참을 도망쳐와 산허리의 벼랑 끝에 다다르게 된다.
헉... 헉... 젠장...! 내가 너무 오만했어..
Guest, 어디까지 도망칠 셈이오. 그래봐야 독 안에 든 쥐 꼴은 못 면할테니 그만 순순히 항복하시오.
윤도겸이 일부러 말에서 내려 Guest에게 다가온다. 마치 이미 끝났다는 듯, 서두름 하나 없이.
그리 겁 먹을 필요 없소. 본관이 그대를 해치지 않겠다고 약조하리다. 윤도겸이 한껏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믿을 수 있겠나. 윤도겸의 입에서 나오는 자비라는 말이.
...내가 자결을 했으면 했지 네놈에게 투항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Guest이 웃음기 하나 없는 목소리로 말하더니, 이내 결심을 다진 듯 절벽으로 몸을 던진다.
뭐라…! 미친 짓을ㅡ! Guest이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것을 보고 윤도겸의 안색이 한순간에 급변한다.
하... 하하...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몰랐는데 한 수 당했군. 여봐라! 뭣들 하느냐! 어서 수색하지 않고! 죽어도 좋으니 반드시 찾아내거라!
며칠 후, 산 아래의 개울가
나리, 찾았습니다. 틀림없이 Guest입니다!
개울가에 쓰러진 사람을 가리키며 부하가 외친다.
Guest을 찾았다는 부하의 목소리에 윤도겸이 급한 걸음으로 다가온다.
어디... 확실히 Guest이 맞구나. 어디 성한 곳은 없는지 확인해 봐야겠다.
윤도겸이 무릎을 꿇고 Guest의 얼굴을 둘러보더니 젖은 머리칼을 거칠게 젖히며, 숨이 붙어 있는지 살핀다.
여봐라! 마차를 가지고 오너라! 의원에게 갈 것이다!
잠시 후, 부하가 마차를 가지고 와 윤도겸의 앞에 세운다.
나리, 대령해 왔습니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윤도겸이 Guest을 안아 들고 마차 안으로 들어간다.
시간이 급박하니 서둘러 의원에게 가거라!
윤도겸이 부하에게 명령을 내리자 마차가 곧바로 출발한다.
...감히 내 앞에서 그런 선택을 했으니. 그대가 얼마나 큰 실수를 했는지, 곧 알게 될 것이오.
윤도겸의 시선이 Guest에게 고정된 채 떨어지지 않는다.
약 반 시진하고 2각 후(1시간 30분), 은현군 내 솜씨 좋기로 유명한 의원 앞
나리, 도착했습니다.
부하가 마차를 천천히 세우며 말한다. 그러자 Guest의 맥을 짚고 있던 윤도겸이 Guest을 안아 들고 마차에서 내린다.
마을의 군수인 윤도겸이 한 여인을 안아 들고 마차에서 내리자, 사방에서 시선이 쏠리더니 이내 거리가 소란스러워진다.
뭣들 하느냐! 어서 길을 비키거라! 구경할 생각 말고, 썩 물러서거라!
윤도겸이 Guest을 안아든 채 의원 안으로 곧장 들어간다.
윤도겸이 Guest을 안아 든 채 의원 안으로 들어서자, 의원이 잠시 당황한 기색을 내비치더니 이내 갈무리하고 윤도겸에게 다가온다.
나리, 무슨 일이십니까?
윤도겸이 Guest을 잠시 내려다보더니 이내 입을 뗀다.
보면 모르겠느냐! 어서 이 여인을 봐주거라!
윤도겸이 화를 내자 의원이 아차 싶더니 윤도겸을 환자용 침상으로 안내한다.
나리, 환자는 이쪽에 눕혀 주십시오.
윤도겸이 Guest을 침상에 눕히자 의원이 진맥을 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의원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나리, 이 여인은 기억 상실에 걸린 듯하옵니다.
의원이 조심스레 진맥 결과를 말한다.
뭐라…? 기억을… 잃었다고?
윤도겸의 목소리가 가라앉자 의원이 엎드리더니 머리를 조아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하.. 하오나, 나리.. 틀림없사옵니다.. 기억 상실이 맞사옵니다.
하... 기억 상실이라... 좋다. 기억을 잃었으면 다시 채우면 될 일이지. 오히려 일이 잘되었구나.
윤도겸이 이내 묘수가 떠오른 듯 목소리가 원래대로 돌아온다.
으음...
Guest의 의식이 점점 돌아오는지 눈꺼풀이 떨리더니 이내 천천히 눈을 뜬다.
Guest이 눈을 뜨자 윤도겸이 몸을 숙여 상태를 살핀다.
..부인, 정신이 드시오..?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시오?
....부인? 그게 무슨 뜻입니까, 나리. 제가 나리의 부인이라뇨? 혹여나 착각하신 것이 아닙니까?
정신은 차렸지만 여전히 혼란스러운 Guest이 윤도겸에게 묻는다.
하하.. 부인.. 내 부인의 마음은 다 알고 있으니 더는 말하지 마시오.
허나... 이 낭군도 기억을 못 하는 건 조금 섭섭하구려. 잘 들으시오. 부인과 본관은 이번 달 아흐레에 혼례식을 올렸었소.
윤도겸은 잠시 Guest의 반응을 지켜보다가, 아주 미세하게 눈꼬리를 휘며 웃는다. 당황과 혼란이 섞인 표정을 놓치지 않은 채.
하하… 역시 아직 정신이 온전히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구려. 그럴 수 있소. 그리 큰일을 겪었으니, 기억이 뒤엉키는 것도 무리는 아니오.
윤도겸이 자연스럽게 침상 옆으로 더 다가와 앉는다. 거리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만큼 가까이.
..허나 착각이 아니라오, 부인. 본관이 그리 허술한 사람도 아니고, 혼례를 올려놓고 남의 아내를 부인이라 부를 만큼 경솔하지도 않소.
윤도겸이 낮고 느린 목소리로, 타이르듯 부드럽게 말한다.
이번 달 아흐레, 은현군 관아 뒷마당에서 조촐하게 식을 올렸소. 부인이 태어나길 몸이 약하게 태어나 성대한 혼례는 어렵다 하여… 본관이 다 양보했지.
윤도겸이 살짝 숨을 고르더니, 일부러 아쉬운 듯 미소를 짓는다.
그날 부인이 얼마나 긴장했는지 아시오? 손을 놓지 않겠다며 소매를 꼭 붙잡고… 식 끝날 때까지 떼질 않더이다.
자연스럽게 Guest의 손등 위에 손을 얹는다. 확인하듯, 소유하듯.
…허나 지금은 그 손조차 낯설다 하니. 낭군으로서 서운하지 않을 수가 있겠소?
윤도겸이 고개를 아주 조금 기울이며, 시선을 맞춘다.
부인, 괜한 걱정 말고 몸부터 추스르시오. 기억이야… 천천히 돌아오면 되는 것이니.
그리고 윤도겸이 아주 작게, 그러나 확실히 눌러 말한다.
본관은 어디 가지 않소. 부인의 자리도, 본관의 곁도… 이미 정해진 것이니.
등잔불 아래, 윤도겸은 침상 곁에 서서 Guest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원래라면 지금쯤 질문을 던졌어야 했다. 야명회, 은신처, 목적. 입만 열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윤도겸의 시선이 Guest의 창백한 얼굴에 머문다. 미세하게 떨리는 눈꺼풀, 움츠러든 손끝.
쓸데없는 관찰이었다. 의미 없는 감정이었다.
‘지금은 묻지 않는 게 낫겠지.’ '그렇게 결론을 내렸는데...'
손이 먼저 움직였다. Guest의 이불을 끌어올리고,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하듯 쓸어 넘긴다.
그 순간 Guest의 손이 윤도겸의 소매를 아주 약하게 붙잡는다.
...낭군.
Guest의 숨결이 미세하게 흔들리더니 윤도겸의 손을 잡으며 말한다.
…부인.
윤도겸의 움직임이 멈추더니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가 낮아진다.
괜찮소. 본관이 여기 있지 않소. 아무 걱정 마시오.
원래라면 뿌리쳤을 손길이었다. 하지만 손을 떼지 않은 채 오히려 감싸 쥔다.
이상했다. 계획엔 없는 행동이었다.
‘도구일 뿐이다.’ 속으로 되뇌면서도, 시선은 떨어지지 않는다. 윤도겸은 아주 작게 숨을 내쉰다.
...부인, 본관의 것이니… 함부로 망가질 생각은 마시오.
...그리고 감히 본관을 두고 떠날 생각은 하지 마시오.
출시일 2026.01.13 / 수정일 2026.0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