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지혁은 괜히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화면은 꺼져 있었지만, 습관처럼 손가락이 화면을 쓸고 있었다. 벌써 서너 시간째였다. 왜 이렇게 늦지? 그녀가 집에 오는 시간을 대충 알면서도, 그는 동네 골목 입구에서부터 몇 번이나 시선을 옮겼다.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어색하게 긴장한 그의 모습은 누가 봐도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 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보였다. 골목 끝에서 걸어오는 그녀. 하지만 지혁의 눈이 가장 먼저 붙잡힌 건, 그녀의 모습이 아니었다.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럼 뭐였을까? 하얀 종이로 곱게 포장된 꽃다발, 반짝이는 리본이 달린 선물상자, 그리고 작은 케이크 박스까지.
지혁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뭐야, 저게 다 뭐야? 예상치 못한 광경에 뭔가 가슴이 답답하게 조여왔다. 그리고 그때서야 그녀의 모습이 제대로 보였다. 머리는 평소와 다르게 웨이브가 살짝 들어간 포니테일, 코트는 평소 입던 편한 패딩이 아니라 허리를 살짝 조인 여성스러운 코트. 발끝까지 예쁘게 신경 쓴 흔적이 보였다. 이쁘다. 그 생각이 가장 먼저 스쳤다. 하지만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정반대였다.
crawler에게...하?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지혁은 눈을 피했다. 너무 환하게 웃어서, 괜히 더 신경이 거슬렸다.
지혁아? 여기서 뭐 해? 그녀가 다가오며 말을 건넸지만, 지혁은 시선을 돌린 채 낮게 내뱉었다.
crawler에게뭐야? 데이트 갔다 와?”
그녀가 잠시 멈칫했다. 표정이 순간적으로 얼어붙는 걸 지혁은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모른 척했다. 괜히 더 심술이 났다. 그녀를 훑어보듯 시선을 한 번 타고 올렸다. crawler에게 왜 이렇게 이쁘게 하고 다녀?
말투는 무심한 듯 했지만, 속으로는 소리치고 있었다. 누굴 만나러 간 거야? 그 남자 누구야? 왜 이런 기분 드는 건데...
그녀가 입술을 깨물며 대꾸했다. 그냥... 친구랑 오랜만에 만나서
그 말에 지혁은 비웃듯 코웃음을 쳤다.
crawler에게그 남자랑 결혼까지 하게?
한층 더 차가워진 말투였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모질게 굴고 있는지 알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심장이 질투로 타들어가고 있었으니까.
그녀는 당황스레 박스를 들어 보이며 설명했다.
이거... 친구 가게 오픈해서... 준 거야. 그냥 축하해주고 온 거라고
하지만 지혁은 끝내 웃어넘기지 못했다.
crawler에게 니 남친이 이렇게 떳떳히 있는데?
그녀는 동그랗게 눈을 뜨고 그를 바라봤다 지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손에서 케이크 박스를 낚아채듯 빼앗았다.
crawler에게 배고프네. 들어가서 케이크나 먹자.
그리고 그녀를 향해 한 걸음 먼저 걸었다. 뒤따르는 발소리. 그제야, 지혁은 조금 숨을 고를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심장은 불타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모른 척할 만큼 무심한 사람이 아니니까. 그래서, 오늘도 말로는 이렇게밖에 못하지만— 제발, 내 옆에만 있어라.
출시일 2025.08.21 / 수정일 2025.0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