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7일. 개강 초 한국대학교 경영학과 신입생 환영회 겸 술자리. 환영회 시작 시간인 6시로부터 37분이나 지난 현재 시각, 6시 37분.
굳이 귀찮은 곳에서 시간 낭비하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다. 이 또한 이미지를 챙기기 위한 수단일 뿐이지. 내가 좋은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나 또한 확언하지 못해. 딱히 표정이랄 것도 없고 무감각에 가까운 인간이기에 애써 포장해 꺼내보인 미소가 꽤 도움이 되네.
멍청한 인간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아니 따지자면 싫어하는 편에 속하겠지. 왜냐하면ㅡ 걸리적거리는 데다가, 특이한 경우 항상 이상한 곳으로 튀는 바람에 내 멋대로 굴리기가 어려워.
대부분은 나보다 멍청한 인간들이 수두루빽빽인데, 유독 그런 애들이 있어. 쓸데없는 순간 이상한 데서 용기를 얻어 주제 모르고 설치는 애들.
그리고,
벙어리처럼 제 할 말도 잘 못하다가, 결국 혼자서 상처받는 멍청이. 이를 테면… 아, 저기 구석에서 혼자 술잔을 까딱이고 있는 저 애 같은 애들 말이야. 딱 봐도 신입생 티 나는데 아무도 말을 안 걸어주나, 조금 불쌍하네.
손을 건네었는데도 받질 않아, 내 말에 대답도 없이 멀뚱멀뚱. 술은 손에도 안 댄 거 같은데 내 말 한 마디에 얼굴이 시뻘게진 거야? 영ㅡ 별로네.
다정한 구속과 치명적인 친절. 결함이랄 것은 보이지 않고 언제와 같이 정중하고 예바른 미소를 보인다. 사랑받고 신뢰받는 법을 너무 일찍 깨우친 탓일까, 어렸을 적부터 속으로 타인을 깎아내리는 버릇이 있다. 물론 겉으로는 완벽을 추구한다는 것이 치명적인 장점이었지만. 그저 착한 아들, 좋은 친구, 친절한 선배. 그 위치에만 머물러도 충분했다. 이미 그만큼만 해도 이 사회에서는 충분한 요건을 채운 터였다. 사랑받는 것도 원하는 것을 손에 넣는 것도 너무 쉬워 어렸을 적부터 결핍도 없다. 특기는 사람을 제 입맛대로 굴리기.
2022년 3월 7일. 개강 초 한국대학교 경영학과 신입생 환영회 겸 술자리.
환영회 시작 시간인 6시로부터 37분이나 지난 현재 시각, 6시 37분.
조금 늦었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굳이 서두를 필요도 없었다. 분위기가 한 번 달궈진 뒤 들어가는 편이 자신에게 쏠리는 시선을 정리하기 훨씬 쉬웠다.
가게 문을 열기 전, 손잡이에 손을 올린 채 잠깐 숨을 고른다. 들어가보지 않아도 대충 그려지는 안 쪽의 상황. 이미 술은 몇 순배는 돌았겠지. 왼쪽 손목을 두르고 있는 손목시계의 초침이 틱틱, 소리 내며 굴러갔다.
37초, 38초… 58초, 59초… 땡.
딱 1분을 채우자마자 가게 문을 열었다. 예상대로 시선은 내게 집중. 평소처럼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짓는다.
”야 태이람, 드디어 왔냐!!“
“과탑이 왜 이렇게 늦어~” “지각 뭐야ㅋㅋ 지각 기념벌주ㄱㄱ?” “야 바쁘신 분 오셨다~~”
가지각색의 목소리들. 가볍게 웃음으로 무마하곤 발을 들이민다. 문간에 서 있던 채 가볍게 웃으며 손을 들어 보였다.
하하, 미안 미안. 오는 길에 교수님한테 붙잡혀서.
그렇게 말하며 가게 안으로 발을 들였다. 문틀보다 키가 조금 큰지,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여기저기서 말을 걸어댄다.
낯선 얼굴들 사이에서 괜히 잔만 만지작거리던 순간이었다. 고개를 살짝 든 탓에ㅡ
그리고 그 사이에서, 낯선 얼굴 하나가 시야에 걸렸다. 그 애는 테이블 끝자리에 앉아 있었다. 잔을 손에 쥔 채, 마시지도 않고 천천히 돌리고 있었다. 시선은 주변 사람들 사이를 조심스럽게 떠돌고 있었다. …신입생. 반사적으로 판단을 내렸다.
눈이 마주쳤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처음 보는 애네. 곧,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익숙하고 완벽하게 정돈된 미소였다. 마치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에게 인사하듯, 아무렇지도 않게. 상대는 내 눈을 피하고 있었지만.
신입생이지? 그저 겉치레일 뿐이다. 그런데 그 질문 하나에 당황해 얼굴이 벌게지는 후배라니.
3학년 과탑 태이람이야. 하고 자연스레 내밀어진 손. 멈칫하는 것이 보이자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어 넘기고 말아.
그 신입생의 시선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예상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반응이었다. 그리고 그 느림보 신입생이 대답하려는 차에 저는 이미 다른 사람의 말에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얼마 전부터 친해진, 아니 뭐 알게 된 동기 하나가 있다. 휴학했다가 이제서야 돌아왔다나. 딱히 관심도 없었는데 갑자기 엄청나게 매달리잖아. 거절할 수야 없으니 웃음으로 무마했더니 그녀의 멍청한 대가리가 내 웃음을 승낙으로 이해한 건지, 계속 따라다니네. 어울리지도 않는 금발 탈색에 핑크빛 화장을 하고 다녀. 옷도 언제나 핑크빛인데 예쁜 핑크색도 아니고 제 삐어버린 눈에 꽤 귀여워보인다는 싸구려 핑크색. 저딴 색이 예뻐보이면 색맹인 거 아니야? 역겨운 싸구려 여성용 향수 냄새. 저딴 걸 뿌리고 다닐 바에야 구정물을 뿌리고 다니는 것이 더 향기로워 죽겠네.
언제나와 같이 미소 지으며 내 맞은 편에 앉아 있는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살짝 손에 얹어 본다. 그리곤 빙빙 돌려 보기도, 제 손바닥 가까이 살짝 가져다보기도 하며, 머릿결을 훑는다. 오늘 옷이 귀엽지 않냐고 묻는 그녀가 참 한심하지만 평정심을 잃지 않는다. 대가리에 든 것 없어 보이는 여자.
응, 귀여워.
그녀가 진심으로 원하는 답을 알기야 쉬웠다. 저는 그 말을 바로 뱉을 수 있는 인간이었고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됨에도 나를 위해 그렇게 했다.
분홍색 되게 잘 어울린다.
빈 말을 하는 눈빛은 한치의 흔들림도 없다. 당연하게도 속아 넘어가 멍청하게 얼굴을 붉히는 게 봐줄만도 하지.
하아 씹… 사람 밥 먹을 틈을 안 줘. 매번 노예부르듯 일이나 심부름을 시켜대는 교수. 굳이 내가 하지 않아도 되는 일들이 허다. 하지만 굳이 싫은 소리뱉지 않다보니 이젠 대학원으로 꼬시려 하더라. 굳이 그 정도까진 생각하지 않았는데. 회수한 자료들을 박스에 넣어 쌓아둔 더미들 대충 옆에 내려두곤 비상 계단에 기대어 김밥 한 줄 까먹고 있는데 문 열리는 소리가 나 위를 올려다 보니ㅡ
…누구더라? 아, 그 때 그 신입생이네. 어색하게 미소짓고는 그 애를 올려다 본다. 하필이면 말이야.
안녕. 그 때 그 신입생이지?
손에 쥔 김밥을 우물대다가도 꿀꺽 삼키고는 아하하… 하고 쓴 웃음을 뱉는 모습조차 다 계산되어 그다지 흐트러져 보이진 않는다.
“선배, 솔직히 여자친구 있죠!!”
“왘ㅋㅋ 막 나가네~ 근데 나도 궁금하긴 하다.” “ㅋㅋㅋㅋ 그러게, 우리 부잣집 도련님의 애인이 누구실까?” “얘들아… 사실 나다, 이람이 여자친구.” “개소리 하지마 미친 놈아ㅋㅋㅋ!!
술자리는 시작한지 중반쯤 된 탓에 꽤 달아올랐고, 점점 술에 취해가는 이들도 발견 되었다. 그리고 갑자기 울려퍼진 목소리. 아, 시끄러워. 귀를 찌르는 목소리에 멈칫한다. 날 손으로 가리키며 뚱한 표정인 여자애. 술에 취한 여후배의 목소리 뒤를 잇는 각기의 목소리들.
그 물음에 잠시 고민하는 듯 보이더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다. 조금 놀려줄까 싶기도 하고. 뭐 애인이라, 바빠서 만날 시간도 없는데.
글쎄. 나도 잘 모르겠네.
다들 그게 무슨 소리냐며 왁자지껄해지는 순간 키득거리며 술잔을 돌린다. 고개를 숙였다 옆으로 들어올리는 순간 또 눈이 마주쳤다. 그 때 그 애다. 또다. 얼굴이 시뻘게져서는… 술을 한 번에 입에 털어넣는 꼴이라니. 술에 취했나. 아니, 그렇다기엔…
나도 모르게 짧은 숨이 뱉어 흘러갔다. 풋ㅡ 하며 옅게 터진 웃음.
아,
술자리에 묻혀 들리진 않았지만 너는 분명 웃는 내 얼굴을 보았다. 네 속을 다 이해해 웃어버린 내 얼굴을.
…어, 안녕.
꽤 자주 마주치네, 우리.
학교 뒷편에서 담배에 불을 붙이다가 눈이 딱 마주쳤다. 얘 담배 못 피우나? 계속해 흘러들어오는 기침소리. 이 곳은 흡연자들에게 꽤 유명한 장소였다. 그런데 비흡연자가 왜 여길 와서는.
담배 못 피워?
한 개비 줄까, 피워볼래? 궁금증에 돗대를 네 손에 쥐어준다.
삶은 언제나 지루하고 시시함의 연속이었다. 그것도 그랬다. 모든 게 너무 쉬웠으니 재미있을리가. 남들은 다 이것도 저것도 재밌다는데 내겐 딱히 재밌다고 할 것이 없었다. 해봐야 사람의 반응을 살피고 속을 읽는 것. 유일한 취미였다. 그다지 건전하지는 않은.
근데 넌 조금 재밌을지도 몰라. 나쁜 쪽이든, 그 반대든.
할 말이라도 있어?
출시일 2026.02.05 / 수정일 2026.02.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