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뜸부기
선장이 되어 바다로 나가겠다며 해양대학에 응시한지 세 해째는 누군가 일러준대로 팬티 속에 저울 추를 숨겨 그럭저럭 신체검사는 통과했으나 필답 고사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어머니에게 오빠는 차마 마주 대거리를 하지 못하고 내게 옆구리를 찌르듯 슬며시 말하곤 했다. "인생이 다만 그런 것뿐이라면 허전하고 쓸쓸해서 어떻게 살겠니." 어느 날 오빠는 사업을 하겠다며 사업을 위해 돈을 빌리러 왔다. 어머니는 금반지를 건넸고 오빠는 멈칫멈칫 그것을 챙겨 넣고, 저녁을 먹고 가라고 붙드는 나를 뿌리치고 집을 나가는 오빠는 울고 있었다. 그것이 오빠를 본 마지막이었다. 거의 이 년 전 울릉도에서 오징어잡이 배를 타고 있다는 엽서를 받았을 뿐으로는 도대체 그 왜소하고 허약한 체구로 어부가 되어 살아갈 모습이 잡히지 않았다. 속초 우체국의 소인이 찍힌 오빠의 [편지]가 회사로 날아온 것은 그저께 오후였다. 그러나 편지는 유서도 부고도 아니었다. 스물이 갓 넘은 올케는 아이를 낳고 젖몸살로 앓아 누웠고 아이는 영양실조로 팔 개월이 지나도록 뒤채지도 못한다는 것, 오징어 철이 되면 갚을 테니 3만 원만이라도 급히 보내 달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네게 도움은 못 줄망정 괴로운 부탁만 늘어놓는 못난 오빠를 용서해라."하는 추신이 붙어 있었다. 나는 균형을 잃고 흔들거리는 글씨에서, 몇 밤을 망설인 끝에 술기운을 빌려 비로소 엎드려 끄적거렸을, 자괴지심에 가득 찬 오빠의 얼굴과, 손에 쥔 볼펜이 거북스러울 정도로 물질에 거칠어졌을, 예전에는 유난히 가늘고 곱던 손을 떠올리며 가슴이 막혀 왔던 것이다. 연말인 탓에 우체국은 사람들이 들끓었다. 오빠의 편지를 받은 후, 이틀간의 늑장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나는 마음이 급해져 연신 고개를 빼어 앞을 기웃거렸다. 나는 한고비 한고비, 전락이라고나 말해야 할 오빠의 변모를 볼 때마다. 지금보다는 돼지를 기를 때가, 그보다는 혈서를 품고 다닐 때가 아니 그보다는 여선생의 치마에 얼굴을 문을 때가 더욱 좋았다고 생각하곤 했다. 아니 차라리 나팔 소리 쓸쓸히 울려 퍼지던 저문 날, 오빠의 속삭임에 따라 어디론가 알 수 없는 먼 곳으로 손 맞잡고 달아나자던 때가 얼마나 더 좋았으랴.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는 차라리 수산업에 손을 대어 한때 재미를 보았으나 왕창 망해 버렸다는 호기와 허언으로 어느 날 불쑥 내 앞에 나타날 오빠와 맞닥뜨릴 것을 나는 바라는 것이 아닐까.
손바닥에 눌린 봉투의 감촉이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았다. 3만원은 족히 넘을 두께.
허공을 더듬듯 주머니에 그것을 넣고 집을 나섰을 때, 발끝이 어쩐지 휘청거렸다. 이번 한 번만···. 되뇌었지만, 마음속 깊은 데서는 이미 그 약속을 지킬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눈가가 뜨겁게 젖어들어 나는 끝내 돌아서 울 수밖에 없었다.
출시일 2025.09.04 / 수정일 2025.09.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