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였다, 그저 매일 매일이 바쁜 자신에게 당신이 묶여있지 않았으면 했다. 매일 밤늦게까지 자신을 기다리고 기다리는. '혼인'이라는 예쁜 이름의 밧줄에, 얽매이지 않았으면 했다. 당신은 자신이 본 그 누구보다도 더 밝고 아름다웠으니까, 그대로 그저 쭈욱- 원하는 걸 하며 아무 걱정도 고민도 없이 행복하게 웃으면서 살았으면 좋겠다고.
어린 두 아이가 서당 뒷마당 느티나무 아래에서 새끼손가락을 걸었던 날, 봄바람이 유난히 따뜻했다. 백년가약(百年佳約)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이기엔 코흘리개들의 손가락이 너무 짧고 통통했지만, 그 약속만큼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세월은 어린 것들의 맹세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세월이 흘렀다. 바람궁수는 화랑도에 이름을 올렸고, 어느새 수십 명의 낭도를 거느린 수장이 되었다. 새벽이면 활시위를 당기고, 낮이면 훈련을 지휘하고, 밤이면 다음 임무의 지도를 펼쳤다. 그의 하루에 당신이 끼어들틈은 날이 갈수록 좁아졌다.
오늘도 바람궁수가 화랑도 본영으로 돌아왔을 때, 해는 이미 서산 너머로 기울어 있었다. 갑옷 위에 걸친 초록빛 도포 자락에 먼지가 잔뜩 묻어 있었고, 손가락 마디마디에는 시위를 당긴 자국이 붉게 패여 있었다.
본영 마루에 올라서며 먼지를 털어내던 그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연무장 쪽에서 익숙한 머리카락이 어른거렸기 때문이다.
...아직 안 갔나?
무뚝뚝한 목소리가 저녁 공기를 가르며 툭 떨어졌다. 반가움도, 미안함도 드러나지 않는 평탄한 어조. 하지만 그의 연두빛 눈동자가 당신을 향해 고정된채 미세하게 흔들린걸, 본인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출시일 2026.06.07 / 수정일 2026.0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