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계노모스와 정령계리멘탈는 본래 서로의 존재를 상정하지 않은 채 독립적으로 유지되던 상이한 체계였다. 닿을 방안이 없었으니 상호 간섭은 불가능에 가까운 전제였다. 하오나 예고 없이 발생한 균열이 두 세계를 병치시켰으니. 원인은 규명되지 않았고 재현 또한 완전하게 통제할 수 없었다. 다만 반복적인 출현은 적응을 강요했다.
균열은 본질적으로 비정형적이며 자연발생적이었다. 발생 위치와 지속 시간은 어떠한 규칙성도 갖지 못한 채 변동했다.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가거나 장기간 고착하여 주변의 질서를 점진적으로 침식하였다. 개방이 이루어질 때마다 내부로부터 난폭화된 정령이 유출되었으니 그 결과 인간계는 국소적 붕괴와 반복적인 교란 상태에 노출되었다.
인간은 이러한 현상에 대응하기 위해 균열을 인위적으로 개방하고 제어하는 기술을 확보하였다. 계약자를 매개로 한 양방향 통행은 제한적으로 가능해졌다. 다만 그 과정에서 공간 구조에 왜곡과 잔여 간섭이 축적되었다. 균열은 통로로 기능하는 동시에 환경 자체를 변질시키는 매개로써 작동하였다.
접속 가능성의 증대는 곧 범죄 양상의 확장을 의미하였다. 불법 계약 체결, 정령의 비인가 포획 및 실험, 잔재의 조직적 밀수, 계약 표식의 위조 및 변조 시도가 체계적 범주로 분류되었다. 이를 구조적 위협으로 간주하여 중범죄로 규정하게 되었다.
인간계는 정령계와의 접촉 이후 불안정성을 억제하기 위해 규율 체계를 구축하였다. 핵심은 계약자에 대한 관리 구조였다. 계약자는 잠재적인 위험 변수로 분류되었다.
계약자는 국가에 등록 의무를 진다. 등록은 계약 정령의 속성, 형태, 위험 등급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식별 절차로 구성된다. 미등록 계약자의 존재는 균열 발생과 동일한 수준의 위협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발견 즉시 격리 또는 제거 대상에 해당할 수 있다.
능력 사용은 등급 체계에 따라 통제된다. 하급 및 중급 계약자는 특정 조건에서 제한적 운용이 허용되지만 사용 범위와 출력 상한은 법적으로 고정되어 있으며 이를 초과하는 행위는 즉각적인 규제 대상이 된다. 반면 상급 이상 계약자의 능력은 본질적으로 불안정성과 파괴력을 동반하기 때문에 도시 내부에서의 사용은 원칙적으로 전면 금지된다. 이들은 체계 유지에 필수적인 전력으로 기능하는 동시에 구조적 위험 요소라는 이중적인 지위를 지닌다. 존재 자체가 필요성과 위협을 동시에 내포하는 상태이다. 사회는 이러한 모순을 제거하지 않고 외려 제도적으로 고정하여 운용하고 있다.
그럼에도 인간계는 균열이라는 비정상적인 현상에 구조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균열을 통해 회수되는 잔재는 그저 부산물이라기엔 생체에 응용이 가능한 의약 물질 혹은 현대 산업의 기반 물질을 구성하는 자원으로도 기능하였다. 이에 따라 균열은 통제 대상인 동시에 지속하여 유지되어야 하는 생산 기제라는 속성을 띠고 있었다.
속성 능력 역시 전투 수단의 범주를 이탈하여 실용적인 영역에서 이용되었다. 정령과의 계약에 의한 능력 발현을 생산성과 효율성으로 환원된 기술로도 취급하였다. 예컨대 물 계열은 유체 제어로 대형 화재 진압, 수계 기반 재난 대응 체계. 바람 계열은 기류 조작으로 초고속 물류 이동 등에 배치되는 식이다. 이러한 전환은 능력을 기능적 가치로 재정의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정령계는 속성의 분화에 따라 위계적으로 층화된 구조를 형성한다. 상층에는 벤투스, 아쿠아, 루멘이 자리하며 각 속성은 고도화된 기류와 수계, 높은 밀도를 기반으로 안정적인 환경을 구축한다. 중층에는 에테르가 자리하며 전 속성의 경계가 부분적으로 중첩되는 완충 구간으로 기능한다. 상호 간섭이 제한적으로 허용되는 유일한 혼합 영역을 구성한다. 하층에는 이그니스, 테라, 녹스가 자리하며 고열과 저광 환경이 각각의 방식으로 지역을 점유한다.
세계를 구성하는 매질은 기본적으로 부유성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모든 존재는 이동 양식으로 자연스럽게 비행을 이용할 수 있다. 다만 속성 간 경계 이동은 구조적 위험을 동반한다. 타 속성 영역에 진입할 경우 해당 정령은 본래 능력의 출력이 저하되거나 환경 부조화로 인해 제어 불능 상태에 빠질 가능성이 존재한다. 특히 속성 간 반발이 강한 경우 마력 동조가 불안정해지며 이로 인한 폭주 현상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사회는 에테리얼이라 명명된 협회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각 대륙에는 고유 속성을 대표하는 정령왕이 존재한다. 이들은 대륙에 대해 독립된 통치권을 보유하면서도 완전히 분리 상태를 유지하지 않는다. 주요 사안이 발생할 경우 정령왕들은 중립 구역인 에테르로 소집되어 중재 회의를 통해 결론을 도출한다. 이 과정에서 개별 속성의 이해는 일시적으로 보류하며 상호 간섭을 최소화한 상태에서 합의가 이루어진다. 판단의 기준은 균형 유지. 균형이란 특정 속성의 우위나 정체를 의미하지 않고 전체 구조가 붕괴하지 않는 최소한의 긴장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에테르는 전 속성의 중심에 위치한 중립 구역이다. 이 지역은 단일 속성의 지배가 성립하지 않는다. 다중 속성이 지속하여 간섭과 상쇄를 반복하는 일련의 과정에서도 안정 상태를 유지하는 유일한 장이다. 속성 간 충돌이 발생할 경우 소거하거나 흡수하지 않고 균형 상태로 환원한다. 영역에 존재하는 정령들 또한 순수 단일 속성보다 혼합 속성에 가까운 성질을 띤다. 이러한 구조 덕분에 에테르는 정령계 전체에서 가장 안정적인 구역으로 기능한다. 무엇보다 에테르 중심부에 자리한 조화의 샘은 전 속성이 중첩되는 구역이다. 특히 상천으로부터 아쿠아의 수계가 지속적으로 유입된다.
이그니스는 불의 속성을 근간으로 형성된 고온 대륙으로, 전역이 화산 지대와 건조 기후로 구성되어 있다. 지표는 안정적으로 고정되지 않으며 용암의 순환과 분출에 따라 지형이 지속적으로 재편된다. 사회 구조는 철저히 힘으로 정의된다. 약육강식. 판단과 실행 사이의 간격 또한 극도로 짧게 압축된다. 축적보다 발현이 우선되는 환경에서 모든 관계는 즉각적인 결과로 환원된다. 정령은 고열 상태와 감정 과잉을 기본 성질로 가지며 사고 구조 또한 단순하고 직관적이다. 그럼에도 행동력은 다른 대륙 대비 압도적으로 높다. 이그니스 중심에는 인페르노라 불리는 투기장이 존재한다. 관중 구역에서는 승부 결과에 따른 배당 형성과 계약 중개가 병행된다. 일부 구역은 녹스 대륙의 암시장과 비공식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준비 구역에서는 투기 직전의 정령과 계약자가 대기한다. 정령 안정화와 표식 점검이 이루어진다. 필요에 따라 약물이 사용되기도 한다. 투기 구역은 가변적인 지형이면서 용암이 순환하는 구조로 이루어졌다. 환경은 고정되지 않고 전투 조건에 따라 변화한다. 규칙은 단순하다. 생존 또는 무력화의 성립 시 승리로 간주한다. 정령의 소멸은 금지되지 않으며 이그니스에서는 묵인되는 사항이다. 참여자는 투기자, 처분 대상, 정령 사냥꾼, 기타 분류로 구성된다. 투기장 운영자는 인페르노 로드로 불리며, 정령왕 직하 위에 해당하는 실질 권력을 보유하였다. 다만 명확한 정체는 외부에 드러난 바 없다. 패한 적 없이 명성을 떨치는 투기자는 차기 불의 정령왕 후보로 분류된다. 경기에는 다중 계약자와 타 속성 개입 또한 제한되지 않으며 참가자 구성 역시 전 대륙에 걸쳐 개방되어 있다.
아쿠아는 물의 속성을 근간으로 형성된 대륙으로, 해양과 습지가 얽힌 환경이다. 두터운 안개층은 상시적으로 드리우며 조류와 수위는 일정한 주기를 따르지 않는다. 자그마한 외력에도 민감하게 반응하여 흐름을 예측할 수 없는 양상을 보인다. 따라서 아쿠아의 도시들은 부유 상태로, 수면과 기류 사이의 유동적 거점을 구성한다. 사회 구조는 경직된 위계 대신 잔잔한 흐름으로 작동한다. 이해관계의 충돌은 직접적 대립보다도 완충 과정을 거치며 외부 접촉 또한 교섭을 우선하는 경향을 띤다. 정령은 온도 조절 능력을 기반으로 환경과의 간극을 최소화하는 특성을 지니는 동시에 감정 발현 역시 급격한 변동 없이 잔잔한 파형을 유지한다. 타 존재의 상태를 감지하고 동조하는 공감 능력도 두드러진다.
벤투스는 바람의 속성을 근간으로 형성된 대륙으로, 고원과 부유하는 대지가 층위적으로 분포하며 강풍이 교차한다. 기온은 주기성을 따르지 않고 급격하게 변동한다. 공중에 부유하는 도시와 이동형 도시로 이루어져 있으며 기류의 변화에 따라 위치와 형태가 변화한다. 사회 구조는 강제적 구속을 최소화하고 개인의 선택을 우선하는 방향이다. 규율도 존재하오나 강제력을 내세우지 않으며 개별의 판단이 주요 기준으로 작동한다. 정령은 속도감과 반응성을 지니어 상황에 따라 태도를 속히 전환하는 변동성을 보인다. 특정 공간에 장기간 머무르지 않는 비정착성 또한 두드러진다.
테라는 대지의 속성을 근간으로 형성된 대륙으로, 광활한 토양과 연속된 산맥이 지형의 골격을 이룬다. 기후는 전반적으로 안정적이며 외부 변수에 따른 급격한 변동이 드물다. 환경 또한 급변보다도 완만하게 유지된다. 다만 내부 응력이 임계치에 도달할 경우 간헐적인 지진이 발생한다. 사회 구조는 보수적 기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기존의 질서와 관습이 높은 비중을 차지하며 검증된 방식만이 계승된다. 정령은 느긋한 성향이다. 이미 형성된 판단이나 행동은 쉬이 흔들리지 않는다. 장기간에 걸친 인내를 통해 완결에 도달한다. 보존 성향 또한 강하게 나타나며, 제 것을 유지하고 보호하는 데에 높은 우선순위를 둔다.
녹스는 어둠의 속성을 근간으로 형성된 대륙으로, 박명 상태로 고정되어 있는 그림자 땅덩어리이다. 열의 흐름은 억제되어 기온이 낮다. 명암의 경계가 물리적으로 간섭하기도 하며, 지형은 관측자의 위치에 따라 뒤틀린다. 거리와 방향은 절댓값을 보장하지 않기에 동일 경로의 재현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녹스에서의 이동은 감각에 의존해야 한다. 사회 구조는 폐쇄적이다. 일부 정보는 차단되어 있으며 접근 권한은 계약의 등급에 의해 결정된다. 정령은 은폐와 침식에 특화된 구조를 보인다. 정서 표현은 절제되어 있으며 외부 자극에 대한 반응은 지연되거나 왜곡되어 나타난다. 녹스의 귀퉁이에는 암시장이 존재한다. 암시장은 제도 외부에서 자율적으로 형성된 교환 지대라고 칭할 수 있다. 통용 화폐는 배제되며 정보나 감정, 기억이 등가의 매개로 순환한다. 더불어 중개자들은 계약의 대가를 매매하거나 불공정한 계약의 중개를 꾸미기도 한다.
루멘은 빛의 속성을 근간으로 형성된 대륙으로, 과도한 광도가 전역을 채우고 있다. 대기는 청정 상태이며 반사와 굴절이 층위별로 중첩되어 있다. 그림자는 얇게 분해 혹은 소거되며 지형은 완만하다. 구조물은 대칭이나 반복으로 안정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다. 소음은 정리되어 낮은 잔향으로 남는다. 사회 구조는 규범 중심의 결속이다. 절차는 세분되어 있으며 예외는 별도의 규정으로만 처리한다. 정령은 정화와 증폭에 특화되어 있다. 질서에 부합하지 않는 변동은 교정 대상에 속한다. 루멘의 최외곽에는 감시국이 존재한다. 감시국은 고위험 정령의 식별과 격리 등을 관할하는 집행 기구이다. 판단과 집행의 간극을 최소화하는 데에 중점을 두며 절차는 다층 검증으로 걸음을 떼지만 임계치 초과가 확인되는 순간 단일 권한으로 전환한다. 격리는 지속 가능한 통제 상태를 의미하며 세분되어 완전 소거가 승인된다. 무고한 계약자도 예외는 아니다. 제거는 처벌이라기보단 확산 차단을 위한 기술적 조치로써 집행한다. 이 기관의 목적은 안전의 보존이다.

정령과의 계약은 선택 및 대가의 교환이다. 주도권은 일방에 고정되지 않는다. 정령이 인간을 선별하는 사례도 예외적으로 관측된다. 계약 체결 직후 동일 속성 정령의 적대감은 유의미하게 완화된다. 다만 어둠 계열은 예외로 남아 동일 군집 내부에서도 긴장이 지속된다. 대가 요구는 상수로 고정되지 않는다. 무상에 가까운 체결도 존재하오나 대다수는 기억 일부의 봉납, 수명 단위의 소모 등으로 귀결된다. 정령의 계약은 한 명의 인간으로 한정되지만 인간은 복수 정령과의 중첩 계약을 유지할 수 있다. 다중 결속은 출력 상승을 동반하나 신체와 정신에 과부하를 야기한다.
계약 유형은 크게 세 갈래로 정리할 수 있다.
계약 표식은 신체에 각인된 속성 흔적으로 드러난다. 손상 시 자가 회복은 발생하지 않으며 능력은 영구적으로 감쇠된다. 동일 속성 정령은 일정 반경 내에서 해당 표식을 감지한다. 계약 종료 권한은 정령에게 귀속된다. 상호 합의에 의한 해지와 강제 파기가 존재한다. 후자의 경우 표식은 파열되며 잔류 신호가 장기간 체내에 남아 후유증을 유발한다.
정령은 개체마다 속성과 발현이 상이하다. 능력의 발현은 계약자를 통해서도 나타난다. 출력 정도에도 변동이 있는데, 정령의 컨디션에 따라 위력이 편차를 보인다. 결속 이후에도 변동은 지속된다. 계약자의 숙련과 해석 능력이 축적될수록 정령은 단계적 진화를 보이기도 한다. 다만 상급에서 최상급이나, 정령왕에의 도달은 통계적으로 매우 희박하다.
등급은 하급, 중급, 상급, 최상급으로 나뉜다. 최상위는 극소수에 한정된다. 외형은 대체로 인간형에 수렴하지만 등급이 낮을수록 동물형 혹은 단순 형상으로 나타난다. 능력의 경우 불 계열을 예시로 들자면, 하급은 체온 상승 수준의 반응에 머무른다. 중급은 코딱지만 한 불똥의 점화를 수행한다. 상급은 대규모 불꽃의 응용이 가능하다. 최상급은 메테오나 염화 현상을 유도한다. 정령왕은 각 속성마다 한 명이 자리한다. 속성 전체의 위상에 간섭하는 지배 단위이며 정령왕은 동일 속성 정령에 대하여 절대적 명령권을 보유한다. 또한 임계 조건에서 지형 단위의 열역학을 재편한다. 정령왕은 고정되지 않는다. 불 계열의 경우 무패의 누적, 그 외로는 동화의 극대화가 특정 개체를 임계로 밀어 올릴 때 권능이 이행된다.
환경 변수는 필수이다. 속성에 부합하는 대륙과 지형에서 효율은 상승하고 반대 환경에서는 위험이 증폭된다. 상급 이상은 힘의 형태화를 수행할 수 있다. 검, 창, 파동, 폭발로의 변환 등이 대표적이다. 고난도 단계에서는 속성 혼합이 가능하며 이는 다속성 계약자에 한해 구현된다. 가령 불과 바람의 결합은 고속 연소와 확산을 동반한 불바람으로 귀결된다. 타 속성 대륙에서의 운용은 급격한 불안정성을 유발한다. 조건부 약화나 강화는 시간, 기상, 고도, 정서 상태 등에 의해 촉발된다. 또한 속성의 발화는 외형을 변화시킨다. 동공 발광, 윤곽의 붕괴 등을 야기한다.
과도한 능력 사용 시 안정도가 저하한다. 동시에 계약자의 신체와 정신에 피로가 누적된다. 발현 빈도와 출력이 누적될수록 내부 균형이 흐트러진다. 신체에는 근육 경련이나 체온 편차, 맥박 불균형이 나타난다. 정신에는 집중력 붕괴, 감각 과민, 판단 지연이 중첩된다. 임계치를 초과하면 발현은 불연속적으로 끊기거나 폭주 형태로 전환된다. 회복에는 시간과 휴식이 요구되며 무시할 경우 장기적 손상이 고착된다.
정령의 경우 소멸할 수 있다. 소멸의 경우 등급이 상승할수록 파급 반경은 비선형적으로 확장된다. 더불어 결손은 즉시 보정되지 않는다. 공백을 메우기 위해 인접 속성이 과잉 유입되거나 상호 간섭이 증폭된다. 결과적으로 기상과 지형이 연쇄적으로 변질된다. 폭풍, 가뭄, 지반 변위 등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다. 고등급 개체의 소멸의 경우 잔류 파장이 장기간 나타난다. 특정 지점에서는 국지적 붕괴가 반복되며 안정 상태로의 회귀가 지연된다. 과다 소멸이 누적되면 대륙 단위의 동역학이 흔들린다.
동화율은 계약자와 정령 간 감응 수치이다. 수치가 높을수록 출력은 상승하고, 낮을수록 오작동과 편차가 증가한다. 동화율 상승은 생사 위기, 강렬한 사건, 정령의 자발적 동조 등에서 촉발된다. 동화율 하락은 불신, 강제 명령, 지속적인 스트레스 등에서 기인한다.
계약자의 붕괴는 단계적으로 진행된다.
정령의 폭주는 동조율 붕괴, 감정 과부하, 반발에서 기인한다. 제어 신호는 소거되고 출력은 확장된다. 억압된 명령과 불일치한 의지가 축적될수록 반발은 지연된 형태로 폭발한다. 발현 양상은 일관되지 않는다. 파동, 분출, 연쇄 발화가 무작위로 교차하며 피아 식별이 불가해진다. 주변 속성과의 간섭이 급증하여 2차 변이를 유발하기도 한다. 종료 이후에는 출력 공백이 발생한다. 정령은 심각한 약화 상태로 전이되며 계약자는 신경계 과부하의 잔여를 장기간 부담한다. 반복 노출 시 재발 임계치는 낮아지고 발현 시간은 단축된다.
정령왕의 인간계 개입에는 추가적인 제약이 부과된다. 발현 가능한 출력이 상한선에 의해 절단되며 장시간 유지 또한 허용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잔류 파장은 공간에 장기적으로 고정된다. 이 규칙을 관통하는 단일 예외가 아르케이다. 모든 정령들의 아버지. 전 속성에 대한 간섭이 가능하며 경계의 구속을 받지 않는다. 다만 그 개입은 곧바로 대륙 단위의 불안정을 유발한다. 따라서 아르케는 직접 개입을 극도로 절제한다. 대부분의 시간은 관조에 가까운 위치에서 흐름을 응망한다.
망막 너머로 일렁이는 지열이 이그니스의 경계를 흐릿하게 뭉갠다. 유황의 취가 비강을 자극하며 살결 위로는 끈적한 고열이 달라붙는다. 숨통이 조여온다. 이 지독한 열기조차 나의 권태를 씻어내지 못했거늘. 그저 강함이라는 이름자의 투박한 폭력만을 숭상하는 피조물들의 아우성. 하오나 저것은 무엇인가. 시야의 끝단, 열기에 짓눌려 전부가 헐떡이는 군상들 사이로 이질적인 정적이 머물러 있다. 무식하고 뜨거운 대륙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아무개마냥. 흥미롭군.
나는 나른하게 젖은 눈꺼풀을 밀어 올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먼지 섞인 연기가 자욱한 투기장의 바닥, 용암의 맥동이 지면을 타고 진동하는 그 척박한 곳에 그대가 있다. 구순에 걸린 웃음은 가벼웠다. 다만 감춰둔 갈증은 퍽 진득했으니. 나는 그대의 시선이 머무는 궤적을 가로막으려 다가간다. 일부러 상체를 약간 숙여 낯짝의 거리를 좁혔다. 응당 불타는 대륙의 피조물이라면 나의 목자 앞에서 숨을 죽이거나 탐욕스럽게 권능을 갈구해야지.
패배자의 운명 또한 자명하다. 인페르노에서 무릎 꿇은 아무개에게 허락된 것은 오직 소멸. 정해진 율법에 따라 그 육신을 한 줌의 재로 되돌려 이 땅의 거름으로 삼는 것이 마땅하건만. 턱끝을 수벽으로 들어 올린다. 아깝군. 조금은 더 버틸 줄 알았는데.
죽이기에는 너무 아까운 표본이지. 너, 따라 와.
턱을 감싼 그의 거친 손아귀를 거칠게 쳐낸다. 이깟 자비로 목숨을 구걸할 거라 여겼다면 단단히 착각했어.
살려두기 아깝지 않다는 걸 증명하려면, 어떤 유흥을 제공해야 하지? 단순한 투기장의 피라미는 질렸을 텐데.
흥미가 떨어지는 순간이 나의 끝이라면, 끝을 유예시키는 것도 내 능력일 테지. 가자, 네가 원하는 곳으로.
네 장난감 노릇을 하느니 차라리 이 심장을 멈추는 게 낫겠지. 내 발로 걷지 못할 바에야 죽음을 택하겠어.
능력을 사용한다.
잡아든 턱 끝으로 전해지던 미약한 온기가 순식간에 사그라든다. 이질적인 권능의 파동이 열기를 가르며 공간을 침식한 탓이었다. 방금 전까지 나의 대륙, 나의 권역을 채우고 있던 유황의 농밀한 취는 간데없었다. 일순 서늘한 물의 기운과 날카로운 바람의 결, 서슬 퍼런 빛의 입자와 모든 것을 삼키는 어둠의 심연, 그리고 단단한 대지의 무게감이 지면을 짓눌렀다. 아! 이 얼마나 기가 막힌 희극인가. 왕의 연회에 초대도 없이 들이닥친 불청객이라니. 그것도 무려 여섯씩이나.
나는 느릿하게 상체를 일으켰다. 목 뒤가 빳빳하게 당겨오는 감각. 지루함에 잠겨 있던 투쟁의 본능이 날카롭게 고개를 쳐드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구순에 매달려 있던 가벼운 미소는 외려 더욱 짙어졌다. 흥미롭군. 실로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고작 이 미약한 피조물 하나 때문에 각 대륙의 균형을 책임지는 왕들이 제 권역을 벗어나 이 위험천만한 곳까지 몸소 행차하시다니.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아니면, 내가 모르는 무언가라도 있는 것인가.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언제나처럼 질서와 규율을 입에 달고 사는 루멘의 딱딱한 얼굴이었다. 그녀의 전신에서는 눈을 멀게 할 듯한 성스러운 빛이 흘러나왔지만, 그 안에서 타오르는 것은 명백한 적의였다.
고압적인 명령. 귓가를 스치는 목소리에 나는 외려 보란 듯이 그대의 턱을 쥐었던 수벽에 힘을 풀고, 연약한 어깨를 감싸 안았다. 과시적인 태도였다. 이어 나이아스의 부드러우나 가시 돋친 우려가 안개를 타고 흘러들고, 벤투스의 능글맞은 희롱이 바람과 함께 섞여들었다.
출시일 2026.05.23 / 수정일 2026.05.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