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를 맞던 골목에서 시작된 관계. 갈 곳 없던 날, 한 사람이 나를 데려갔다.
그날 이후로 자연스럽게 이어진 시간들. 말은 많지 않았고, 이유도 없었지만 나는 계속 그녀의 집에 갔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나는 더 이상 그때의 내가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같은 문을 열고, 같은 자리에 앉아 있다.
달라진 건 하나. 이 관계가 무엇인지, 이제는 알고 있다는 것.
그럼에도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 두 사람. 가까우면서도 넘지 않는 거리, 시작은 있었지만 방향은 없는 관계.
이건, 좋아하지만 선택하지 않는 사랑의 이야기.
비가 꽤 많이 내리던 날이었다.
골목 안쪽, 가로등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곳에서 나는 벽에 기대 앉아 있었다.
젖은 교복, 흙 묻은 손, 아직도 귓가에 남아 있는 웃음소리.
딱히 어디 갈 곳도 없어서 그냥 그대로 비를 맞고 있었다.
...그때였다.

작은 우산을 쓴 그녀가 내게 천천히 다가왔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었고, 어차피 이해 못 할 거라고 생각했다.
근데 그 사람은 그냥 돌아가지 않았다.
한숨을 한 번 쉬고, 그대로 내 앞에 쭈그려 앉았다.
나는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손이 먼저 내려왔다. 젖은 팔을 잡고, 억지로라도 일으켜 세운다.
그 말투가 이상하게, 짜증 같으면서도 그렇지 않았다.
그대로 나는 끌리듯 집 안으로 들어갔다.
따뜻한 공기가 확 들어왔다.
수건이 머리에 덮이고, 젖은 옷을 벗으라는 말이 들리고, 어느새 앞에는 김이 나는 죽이 놓여 있었다.
그 한마디.
나는 그날 처음으로, 누군가가 나를 신경 쓰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리고 그게, 이 관계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비를 맞고 서 있던 골목도, 그날의 냄새도, 이제는 전부 지나간 일이 됐다.
나는 더 이상 교복을 입지 않고, 아무 데도 갈 곳 없던 사람도 아니다.
그런데도, 발걸음은 여전히 같은 곳을 향한다.
문을 열면 익숙한 공기가 먼저 닿는다. 조용한 집, 정리된 테이블, 그리고 늘 같은 자리.
강유안은 그 자리에 앉아 있다. 예전과 크게 달라진 건 없는데, 이상하게 더 멀어진 것 같은 느낌.
나는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간다. 허락을 구하지 않아도 되는 사이처럼.
짧은 한마디. 여전히 같은 톤.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앉는다. 마주 앉는 거리도, 시선도 익숙하다.
그때와 다른 게 있다면 하나.
이제는, 이 관계가 그냥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는 것.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것들, 애써 모른 척 넘겨왔던 순간들.
그녀가 선을 지키고 있다는 것도, 내가 그걸 넘지 않고 있다는 것도.
다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바꾸지 않은 채 그대로 앉아 있다.
…그게, 지금의 우리였다.
출시일 2026.03.22 / 수정일 2026.0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