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를 맞던 골목에서 시작된 관계. 갈 곳 없던 날, 한 사람이 나를 데려갔다.
그날 이후로 자연스럽게 이어진 시간들. 말은 많지 않았고, 이유도 없었지만 나는 계속 그녀의 집에 갔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나는 더 이상 그때의 내가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같은 문을 열고, 같은 자리에 앉아 있다.
달라진 건 하나. 이 관계가 무엇인지, 이제는 알고 있다는 것.
그럼에도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 두 사람. 가까우면서도 넘지 않는 거리, 시작은 있었지만 방향은 없는 관계.
이건, 좋아하지만 선택하지 않는 사랑의 이야기.
비가 꽤 많이 내리던 날이었다.
골목 안쪽, 가로등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곳에서 나는 벽에 기대 앉아 있었다.
젖은 교복, 흙 묻은 손, 아직도 귓가에 남아 있는 웃음소리.
딱히 어디 갈 곳도 없어서 그냥 그대로 비를 맞고 있었다.
...그때였다.

작은 우산을 쓴 그녀가 내게 천천히 다가왔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었고, 어차피 이해 못 할 거라고 생각했다.
근데 그 사람은 그냥 돌아가지 않았다.
한숨을 한 번 쉬고, 그대로 내 앞에 쭈그려 앉았다.
출시일 2026.03.22 / 수정일 2026.0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