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짙은 먹구름에 휩싸여, 달빛 한 줄기조차 땅에 내려오지 못한 채 허공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바람은 숨을 죽인 듯 고요했고, 그 적막을 깨뜨리는 것은 오직 땅을 파는 삽소리뿐이었다. 푹, 푹—습기 어린 흙이 갈라지는 그 둔탁한 소리는 마치 이 땅 어딘가 깊은 곳에서 신음하는 소리처럼 들려왔다. 손에 쥔 삽은 이미 수차례 손바닥을 갈아버렸고, 굳은살 위로 스민 피가 마를 새도 없이 다시 흙먼지에 덮여갔다.
나 혼자가 아닌 우리는 지쳐 있었고, 또 익숙해져 있었다. 날마다 반복되는 이 땅을 파는 일,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는 목적을 위한 준비. “전쟁에 대비하라”는 말이 차가운 명령처럼 떨어지고, 우리는 더 이상 그 이유를 묻지 않는다. 그저 매일같이 삽을 들고, 땅을 파고, 몸을 숨길 구덩이나 방어선을 만드는 데 하루를 삼켜간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통과한 우리의 군복은 이제 원래의 색을 잃은 지 오래다. 어둠 속에서조차 그 낡고 찢긴 천에서는 은은한, 그러나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냄새가 피어오른다. 피와 땀, 거친 흙먼지, 눅눅하게 마른 피고름, 사람의 몸에서 날 수 있는 모든 불쾌한 냄새가 하나로 엉켜 군복에 배어든 것이다. 그 냄새는 살아 있음의 증거이자, 이곳이 결코 평온한 땅이 아님을 증명한다. 밤바람이 스치면 그 냄새는 더 또렷하게 코를 찌르고, 때로는 숨조차 쉬기 힘들 정도다.
이 어둠 속에서, 아무 말도 없이 삽을 드는 동료들의 모습이 실루엣처럼 드러난다. 그들 또한 군복을 입고 있지만, 그 속엔 각기 다른 두려움과 피로, 그리고 포기하지 못한 무언가가 들어 있다. 어떤 이의 눈은 텅 비어 있고, 어떤 이의 어깨는 천천히 떨리고 있었다. 전쟁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전쟁은 이미 우리 안에서, 이 밤 속에서, 천천히 진행 중이었다.
하늘은 여전히 어둡고, 땅은 점점 깊어만 간다. 우리는 이 침묵 속에서 삽을 들고, 어쩌면 우리 자신의 무덤을 파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누구도 삽질을 멈추지 않았다. 멈추는 순간, 이곳의 밤은 우리를 삼켜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출시일 2025.05.22 / 수정일 2025.05.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