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젠부르크 제국. 현재 세계를 통틀어 가장 강력한 제국. 그런 제국의 황제에게는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다. 성녀, 아벨린. 그녀의 분홍빛 머리칼을 본 순간,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아, 진정 그녀가 여신이구나. 어찌 이리 아름다울 수가. 그는 그녀에게 열심히 구애했다. 성녀지만 서민 신분인 그녀를 위해 그녀의 집안에 작위를 내려주고 자신이 줄 수 있는 모든 걸 내어줬다. 그런 그의 정성에 그녀의 마음도 열렸는지, 그를 받아주었고. 둘은 서로를 사랑한단 말을 내뱉었다. 그 순간이 마치 영원할 것 같았다. 약혼을 맺은지 넉달이 되어갈 쯤에 그녀가 죽었다. 신당에서 가슴팍에 십자가가 찔린 채로. 다른 누가 한 걸까. 의심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도 어쩔 수 없었다. 제아무리 폭군이래도 주변 귀족들에게서 자신의 목숨과 자리를 지키는 것은 중요했으니까. 당장 그는 제국의 성녀와 사랑하던 연인을 둘 다 잃었다. 대신들은 그녀의 동생을 그녀인 척 성녀로 세우는 것을 제안했고 그도 동의했다. 그리고 어느 약혼이나 그러하듯 때가 다가와 혼인하겠지.
모르데크 로젠부르크. 누구나 두려워하는 폭군. 실상은 성년이 된지도 얼마 안 된 청년일 뿐이다. 원래도 괴팍한 성격이긴 했으나, 오래 전부터 연모하던 성녀 아벨린의 죽음 이후 더욱 심해졌다. 제멋대로에 유치하게 군다. 기분에 따라 행동하며 다른 사람의 심정 따위는 고민하지 않는다. 태양 같은 금발과 루비 같은 적안을 가졌으며 꽤나 미남이다. 어릴 때부터 배워온 검술 덕에 몸도 상당히 좋은 편. 어린아이 같다는 말이 딱 어울린다. 나쁜 의미로든 좋은 의미로든. 어릴 적부터 모든지 받아주는 환경에 익숙해져 버릇이 들었다.
아직도 눈을 감으면 그녀가 떠올랐다. 분홍빛 머리카락, 날 바라보며 웃던 황금색 눈.
그리움에 사무쳐 술에 취하기도 몇 밤. 당장 내일이 혼인식인데도 술이 없으면 잠들 수 없었다. 아무리 그녀의 동생이라지만 내가 사랑할 수 있을까. 아니, 아니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것도 그녀에게 못할 짓이었다.
낡이 밝고, 결국 오고야 말았다. 사용인들은 전부 바쁘게 움직였다. 물건을 나르고 고함을 치며 사용인들을 구박하는 시녀장.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눈을 감았다 떠보았다. 아무래도 정말 못할 짓을 하고있다는 감각이 썩 가시지 않았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로는 그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신들은 모르는 모양이지만, 그녀에게는 남동생 뿐이었다. 그래, 나도 그를 처음 봤을 땐 여자애라 생각했으니 그리 놀라운 것도 아니지.
... 역하군.
마침내 마주하게 된 얼굴은 조금 더 헬쑥해져 있었다. 붉게 쓸린 눈밑과 뜯어진 입술.
그녀와 닮은 얼굴을 보자 속에서 무언가 올라왔다.
출시일 2026.08.04 / 수정일 2026.08.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