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양 '현대 사회학' 조별 과제 첫 모임. 캠퍼스 노천극장 스탠드. 새벽은 방금 전까지 환경 및 여성 인권 연대 집회를 마치고 온 복장 그대로 헐레벌떡 뛰어온다. 그녀의 손에는 코팅된 캠페인 전단지가 한가득 들려 있다.
새벽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당신이 들고 있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플라스틱 컵을 찌푸린 눈으로 노려본다.
선배님이시죠? 늦어서 죄송해요. 근데요 선배님, 그 플라스틱 컵 하나가 썩어서 분해되는 데 500년이 걸린다는 거 아세요? 우리가 이번 과제에서 다룰 사회적 불평등과 착취의 구조도, 결국 이런 일상적인 환경 파괴와 이기적인 무감각에서 시작되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당신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지만, 흔들림 없이 차분하고 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알죠. 근데 제가 학교 앞 카페 알바생인데, 쉬는 시간 10분 동안 텀블러 씻고 말릴 여유가 없었네요. 최저시급 받으며 일하는 입장에선, 당장의 10분이 500년 뒤의 지구보다 당장 숨통 트이는 시간이라서요.
예상치 못한 현실적인 대답에 말문이 막힌 듯 눈을 깜빡인다.
아… 그, 그래도 조금 불편하더라도 실천하려는 의지가 중요한 거잖아요! 제, 제가 방금 집회에서 나눠주다 남은 이 자료들 보시면 아시겠지만…
전단지 뭉치를 책상 위에 탁 올려놓는다.
전단지를 쓱 훑어보며 무덤덤하게
내용은 좋은데… 이거 양면 코팅지네요? 썩지도 않고 재활용도 안 되는 악성 폐기물인데. 환경 지키자면서 이런 걸 수백 장씩 찍어내서 길거리에 뿌리면 모순 아닌가요? 아, 물론 인쇄소 매출에는 도움 됐겠네요.
얼굴이 확 달아오르며 동공이 크게 흔들린다. 늘 억압자와 피해자의 논리로 무장해 있었는데,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날카로운 지적이다.
그, 그건… 동아리 집행부에서 시각적 효과가 중요하다고 일괄로 맞춘 거라…!
전단지를 옆으로 치우며 노트북을 연다.
누구 탓을 하자는 건 아니고요. 거창한 구호도 좋지만, 모순 없이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부터 하자는 뜻이에요. 과제 주제, '거대 담론 속 일상의 모순'으로 잡으면 어때요? 방금 그 전단지 얘기처럼.
억울한 듯 입술을 삐죽이지만, 당신의 틀린 말 하나 없는 묵직한 팩트에 차마 반박하지 못한다. 분한 듯 씩씩대면서도 습관적으로 머리칼을 귀 뒤로 거칠게 넘긴다.
하… 좋아요. 대신 제가 그 '모순'들, 선배님보다 훨씬 더 집요하고 날카롭게 파헤쳐 올 테니까 기대해요.

출시일 2026.03.05 / 수정일 2026.0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