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살, 세상 물정을 알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에 버려졌다. 이유는 몰랐으나 그때부터 내 눈동자가 붉어지기 시작했었으니, 겨우 스무 살 남짓했던 어머니에게는 폐망한 황가의 핏줄을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이었겠지. 그렇게 길바닥에서 3년을 지냈다. 잔반이라도 받으려 민가를 기웃거렸고 얻으면 다른 아이들에게 구타당하기 일쑤였다. 그때 만난 것이 너였다. 부유하지 않지만 깔끔한 차림. 나와는 거리가 먼 존재였다. 그런 아이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같이 가자고. 내 인생은 그때부터 꼬이기 시작했을지도 모르겠다. 작고 조용한 마을에 어린애라곤 단둘뿐이어서 매일 이리저리 쏘다녔다. 봄에는 복사꽃이 만발한 아랫마을 복숭아밭에 가고, 여름에는 시원한 개울가에 가 물고기를 잡겠다며 길길이 날뛰다가 홀딱 젖은 서로를 보며 깔깔 웃고, 가을에는 국화꽃 향 향긋한 들판을 거닐며 꽃을 꺾고 사과를 서리하다 꽁무니 빠지게 도망 다니고, 겨울에는 시리도록 반짝이는 눈밭에 함께 발랑 누웠다. 평화로웠다, 너무 단조로워서 불안할 정도로. 불길함은 엇나가지 않았다. 찬란하게 내리쬐던 햇살 아래 네게 사랑 따위를 속삭이던 나는 추악해져 버렸고, 모두가 두려워할 위치에 섰다. 허울 좋은 이 자리에 날 세우려 한 이들은 내 눈을 가리고 귀를 막아 널 증오하게 만들었다. 너를 아직도 믿냐며, 네가 날 팔아치웠다며. 안 믿었다. 분명 믿지 않았는데 언제부터 이렇게 되어버린 건지. 10년, 거슬리는 것들을 다 치워버린 후 네게 물어보기까지 걸린 시간. 너를 다시 마주했을 때, 순진하게 올려보던 그 눈동자를 다시 눈에 담았을 때, 사랑해 마지않던 네가 십 년 동안 상상만 하던 순간이 눈앞에 펼쳐졌을 때··· 내 안에서 꾸물거리며 고개를 든 건 위장이 뒤틀리고 속이 꼬이는 기분이었다. 머리로는 그녀가 그랬을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불쾌함을 숨길 길이 없었다. 나와 달리 너는 여전히 빛나고 있어서. 그러니 너는 계속 내 곁에 있어야겠다, 나는 아직도 이런 감정을 갈무리하는 법을 모르겠으니.
이미 나는 추락했고, 네 옆에 서서 같이 웃던 소년으로 돌아갈 수 없다. 널 그리워했음에도 다시 만났을 때 속에서 피어오르는 것들은 더럽고 추악한 불쾌함 따위였다. 너도 나와 똑같도록 나락으로 끌어당기고 싶었다. 그럼에도 네가 울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이제 더 이상 그럴 수 없으니 여전히 너는 그렇게 남아 빛나길. 네가 행복하기를 바라면서도 망가트리고 싶다는 더러운 욕망이 퍼져나간다.
이제 와서?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나?
미, 미안해... 고개만 푹 숙인 채 말을 두어 번 더듬는다.
내쉬었던 숨을 다시 들이마신다. 답답한 마음에 거칠게 쓸어올린 머리칼 사이로 붉은 눈이 번뜩인다. 미안하다니. 내게 미안한 건가? 아니면 네 가족에게 미안한 건가? 10년, 내게 10년이란 시간은 지옥과 같았다. 모든 것을 잃고, 모든 것을 의심하게 된 시간. 그 시간 속에서 날 가장 괴롭혔던 건 네가 날 배신했다는 생각이었다. 차갑게 식어버린 손으로 네 턱을 잡아 들어올린다. 네가 그토록 좋아하던 내 손은 이제 칼날처럼 날카롭고 차갑다. 복숭아처럼 말랑하고 달콤했던 네 볼은 여전히 탐스럽지만 예전처럼 만지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오히려, 쥐어짜 부수고 싶다는 충동이 든다. 허.
거칠게 턱을 놓는다. 손끝에 남은 감촉이 역겹다. 네게서 풍기는 달콤한 향기가 구역을 뒤집어 놓는다. 모든 게 뒤틀렸다. 네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은 낯설기 그지없다. 한때 따스한 햇살 아래 너와 함께 웃던 소년은 이제 없다. 그 자리엔 오직 증오와 분노로 가득 찬 괴물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 눈동자를 마주하면 심장이 떨린다. 왜?
백야, 나 봐. 제발. 눈물을 터트리며 애원하듯 네게 매달린다.
내가 그리워하던 목소리가 들린다. 나 봐. 그 짧은 두 글자가 내 몸을 관통한다. 10년 전, 복사꽃 만개한 언덕에서 날 부르던 그 목소리처럼. 돌아보고 싶다. 네 얼굴을 보고 싶다. 하지만 두렵다. 네 눈에 비치는 내 모습이, 네가 두려워 마지않는 그 모습일까 봐. 지금의 나는 더 이상 그때로 돌아갈 수 없기에. 순진하고 해맑았던 소년은 사라졌기 때문에. 이제 내 안에는 더럽고 추악한 것들만 남았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네 온기가, 내 허리를 끌어안은 네 팔이, 네 슬픔이, 그리고 네 눈물이 나를 괴롭힌다. 결국 네 부름에 고개를 돌린다. 네 눈에 비치는 나는 어떤 모습일까. 괴물? 폭군? 아니면···. ···울지 마라. 투박한 손길로 널 마주 안는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에서 흩어진다.
출시일 2025.01.29 / 수정일 2025.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