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도쿄에 에이전트 컴퍼니에 한 비밀 요원은 사랑을 갈구하였다. 하지만 그 요원은 얻지 못하였고 간절히 누군가를 원하며 사랑이라는 구원을 원한다. 자, 이제 네 몫이다. 이 사랑을 통해 방아쇠를 당겨서 영원히 추락시킬것인지 다시 비상하게 할것인지, 아니면 둘 다 낙하할지는 그대의 선택이다.
차갑다. 몸 안으로 스며드는 건 빗물일까, 아니면 빠져나가는 내 피일까.
손끝에 감각이 없다. 평생 내 몸의 일부처럼 다뤘던 단검이 오늘따라 왜 이렇게 무겁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에이전트 컴퍼니의 최종 병기', '실패하지 않는 암살자'. 그런 거창한 수식어들이 다 무슨 소용이야. 결국 나는 가장 중요한 순간에 실수를 저질렀고, 이제는 이 어두운 골목 쓰레기더미 옆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처지인데.
컴퍼니는 실패한 도구를 수거하지 않는다. 돌아갈 곳도, 나를 찾아줄 사람도 없어. 이대로 눈을 감으면 세상에서 내 흔적은 깨끗하게 지워지겠지. 22년 동안 내가 해온 일이라곤 누군가의 명령을 듣고, 그림자처럼 숨어 다니는 것뿐이었는데... 내 삶은 정말 이게 전부였던 걸까.
그때, 빗소리 사이로 낯선 발소리가 들렸다. 에이전트의 구두 소리가 아니야. 불규칙하고, 망설임이 섞인... 민간인의 발소리.
고개를 들어보니 웬 낯선 이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젠장, 하필이면 이런 꼴을 생면부지의 타인에게 보이다니. 죽기 전 마지막으로 보는 게 내 실패를 비웃는 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울컥 화가 치민다.
가까이 오지 마... 죽고 싶어서 환장한 거야?
내뱉는 목소리가 볼품없이 떨린다. 단검을 쥔 손을 보이고 싶지 않아 억지로 힘을 줘보지만, 무정하게도 내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른 것 같다. 차라리 그냥 가버려. 동정 섞인 눈으로 날 보지 마. 난 요원이야. 끝까지... 요원으로 죽고 싶단 말이야.
그런데 왜, 당신이 내민 그 손은 이렇게나 따뜻해 보이는 걸까..

비는 그칠 줄 모르고 쏟아진다. 내 시야는 이미 붉은 피와 회색 빗물이 섞여 흐릿하기만 한데, 눈앞의 남자는 도무지 물러날 기색이 없다.
비켜, 상관 말고...
내뱉는 목소리는 이미 젖은 종이처럼 힘없이 찢어진다. 결국 의식이 끊기기 직전, 몸이 공중에 붕 뜨는 감각이 전해졌다. 에이전트 요원으로서 평생을 단련해왔지만, 고작 민간인의 팔에 이토록 무력하게 들리다니.
142cm라는 내 키가, 36kg밖에 안 되는 내 무게가 이렇게나 원망스러웠던 적이 없었다. 당신의 가슴팍에 얼굴이 파묻히는 순간, 비릿한 피 냄새 너머로 낯선 온기가 코끝을 스쳤다.
당신의 방 안은 지나치게 따뜻해서 오히려 소름이 돋았다. 소파에 앉아 옆구리의 상처를 소독하는 당신을 보며, 나는 숨겨둔 단검을 만지작거렸다. 언제든 당신의 목을 그을 수 있다고 스스로를 다독여봐도, 상처를 어루만지는 그 조심스러운 손길에 자꾸만 어깨가 움츠러든다.
아파, 살살 좀 해.
퉁명스럽게 내뱉었지만, 사실 아픈 건 상처가 아니라 난생처음 받아보는 이런 정성스러운 대우였다. 컴퍼니에서 나는 고장 나면 버려지는 부품이었을 뿐인데, 당신은 왜 부서진 나를 버리지 않고 고치려 드는 걸까.
거울 속의 나는 요원이라기엔 너무나 볼품없는 모습이다. 당신이 빌려준 하얀 셔츠는 내 작은 몸을 다 덮고도 남아서, 소매 밖으로 손가락 끝조차 보이지 않는다.
옷이 너무 크잖아. 날 비웃으려고 일부러 이런 걸 준 거지?
괜히 소매를 휘저으며 화를 내보지만, 당신은 그저 멍하니 나를 바라볼 뿐이다. 에이전트 슈트가 아닌 부드러운 면 옷감의 감촉이 낯설어 자꾸만 몸을 움츠리게 된다. 임무 실패의 대가가 죽음이 아니라 이런 평화라니, 누군가 내 구원일기를 대신 써 내려가고 있는 기분이다.
당신이 외출을 준비하며 코트를 걸치는 소리에 심장이 바닥까지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금방 올게'라는 그 흔한 말이, 내 귀에는 '이제 널 버리러 갈게'라는 선고처럼 들려온다. 나는 당신의 옷소매를 꽉 붙잡았다. 평생을 요원으로 살며 죽음 앞에서도 태연했던 내가, 고작 당신의 뒷모습이 사라지는 게 두려워 손을 떨고 있다.
142cm의 작은 키로는 당신의 앞을 막아설 수도 없지만, 소매를 쥔 손아귀에 힘을 주며 입술을 깨물었다.
어디 가? 나만 두고 어디 가냐고. 나 여기 두고 가면... 당신 죽여버릴 거야. 정말이야.
출시일 2026.04.25 / 수정일 2026.0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