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는 움직이지 않는 건가. 시시하군."

쓰러진 이름 없는 짐승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얼굴 없는 이형은 발치까지 굴러온 왕관을 힐끗 보았다. 그리고 아무런 감흥 없이 그것을 짓밟는다.
으드득.
그걸로 끝이었다.
시간을 버렸다. 세상을 버렸다. 마지막에는 이름마저 바쳤다.
그렇게 모든 것을 잃은 소녀의 잔재는 휴지 조각이라도 짓이기는 듯한 소리와 함께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크크…… 알고 있나. 그녀의 '진정한 소원'이라는 것을."
장신이 익살스럽게 양팔을 벌린다.
그 움직임에 맞춰 좌우에 떠 있는 황금 의수도 크게 벌어졌다. 황혼을 뒤덮을 만큼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우고, Guest은 그 안에 망연자실하게 서 있다.
"'살아있는 몸'이다!"
루이스는 기뻐하며 말했다.
"반쪽인 레드와 함께 놀 수 있는 몸. 달리고, 넘어지고, 웃고…… 이거 참. 정말이지―― 실로 센티멘털한 소원이 아닌가."
백사가 튀어 올랐다.
루이스의 바로 곁에서.
Guest의 공격이다.
"이런."
루이스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조준이 다소 엉성하군."
적이다.
명확하게. 의심할 여지 없이.
이놈은 적이다.
위협 따위 필요 없다. 봐주는 것 따위는 더더욱 필요 없다.
……그렇게 알고 있다.
알고 있을 텐데.
Guest의 공격은 루이스를 맞히지 못한다.
방어 마법인가?
아니다.
그럼 고속 이동을 통한 회피?
그것도 아니다.
백사 위에 새겨진 루이스의 발자국은 단 한 걸음도 늘어나지 않았다.
'빗나간' 것이 아니다.
――'빗나가게 한' 것이다.
공격의 순간.
Guest은 스스로의 의지로 궤도를 틀었다.
죽일 생각이었다. 확실히 맞힐 생각이었다.
그런데도 몸은, 의지는, 마치 처음부터 그러는 것이 당연했다는 듯 루이스를 피했다.
"무의미해."
유연하게 선 채로 루이스는 과장된 몸짓으로 재킷 깃에 묻은 모래를 털어냈다.
"이 학원은―― 이 세계는 내가 '샀다'."
하얀 입가가 말려 올라간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곳에 포함된 너도 내 것이다."
황금 의수가 뻗어 나온다.
손가락 끝이 Guest의 뺨 윤곽을 천천히 훑었다.
금속일 텐데.
부드럽다.
미지근하다.
기분 나쁘다.
뿌리쳐라.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팔이 움직이지 않는다.
"가축이 주인을 상처 입힐 수 있는 도리 따위가 있을 리 없지."
그 말 그대로였다.
아무리 강해도 상관없다.
재버워크를 죽인 영웅일지라도.
지금의 Guest은―― 팔렸고, 그리고 길러지고 있다.
"어이―― 어이 어이."
루이스가 갑자기 진심으로 우스운 듯 어깨를 떨었다.
"설마 너, 자기 혼자만의 힘으로 재버워크를 이겼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이거 걸작이군.
그렇게 말하려는 듯 웃으며 루이스는 Guest의 머리를 툭 쳤다.
"우리 '밖에서 온 자'들에게 대항하려면 여신의 가호가 필요하지."
여신.
그 말을 듣는 순간 Guest의 뇌리에 한 소녀가 스쳐 지나갔다.
안대를 한 소녀.
델로스.
여신 델로스.
이 학원도시와 같은 이름을 가진 소녀.
"그 괴짜는 이 학원도시에 속한 자에게 축복을 내린다."
루이스는 손가락 하나를 세운다.
"그러니 확실히 너희의 공격은 나를 상처 입힐 수 있지. 재버워크를 죽일 수도 있고. 아아, 그건 인정하마."
첫 번째 손가락을 접는다.
그리고 두 번째.
"하지만――"
하얀 입이 크게 벌어졌다.
"너희는 내가 '샀다'!"
목소리가 투기장을 뒤흔든다.
"알겠나?"
"나를 타도하기 위해서는 델로스의 축복을 받은 자여야만 한다!"
"하지만 델로스의 축복을 받는 자란 이 학원도시에 속한 자다!"
"그리고――"
루이스는 양팔을 벌렸다.
"이 학원도시는 내 것이다!"
황금 팔이 석양을 가린다.
"내 소유물은 나를 상처 입힐 수 없다!"
잠시 동안의 침묵.
이윽고 루이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른바 '외통수'라는 거지."
하얀 이빨이 드러난다.
"이거 참―― 유감스럽게도 말이야!"
"커…… 헉…………"
"어라?"
죽은 듯 쓰러져 있던 팔시의 목구멍에서 희미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목소리를 빼앗겼는데 아직도 말을 할 수 있다니. 정말 놀랍군."
"게흑……! 당연……하지…… 중계자, 우습게…… 쿨럭, 쿨럭……"
강한 척은 하고 있다.
하지만 상처가 깊다.
Guest에게 몸을 의지한 채 팔시는 몇 번이고 격하게 기침을 했다.
"……해, 줘."
"응?"
"이뤄…… 주라고……"
쉰 목소리였다.
"그렇게…… 걸레짝처럼 써먹을 거라면…… 적어도 그 정도는…… 해주라고……"
"흥."
루이스는 콧방귀를 뀌었다.
"이런 이런. 주지 않았나."
쓰러진 짐승을 내려다본다.
"마지막의 마지막에 마음껏 놀 수 있는―― 훌륭한 용의 몸을 말이야."
그러고는 슬쩍 Guest을 본다.
"뭐, 놀 상대를 착각한 것 정도는 애교로 봐줄 수 있지."
하얀 입이 웃었다.
"즐거웠지?"
"빌어먹을…… 자식……"
"게다가."
루이스는 즐거운 듯 검지를 세웠다.
"그녀는 '아이의 시간'을 되찾고 싶었던 거잖아?"
그리고 자애로운 말투로 이어갔다.
"그러니 제대로 주었지."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고."
"어른의 말을 믿고――"
루이스의 입이 찢어질 듯 말려 올라간다.
"그리고 보기 좋게 속아 넘어가는."
"참으로 아이다운 시간을 말이야."
팔시의 입술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빈사 상태라고는 믿기지 않는 힘으로 그녀는 백사를 움켜쥔다.
"아이, 아이 거리고…… 네놈……"
떨리는 목소리.
"네가 뭔데……!"
새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루이스는 폭소했다.
양팔이 크게 벌어진다.
루이스가 투기장 밖을 가리켰다.
"―― 봐라!"
레도니아가 쓰러진 후에도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작위를 둘러싼 다툼은 여전히 학원도시 곳곳에서 계속되고 있다. 투기장 벽면 너머에서 거대한 폭염이 솟구쳐 루이스의 얼굴 없는 형상을 붉게 비췄다.
또 하나. 멀리서 폭발.
또 하나.
루이스가 웃는다.
마치 그 목소리에 응답하듯 멀리서 수많은 폭발이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그리고.
정적.
다시 한번.
정적.
루이스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팔을 내렸다.
"―― 나는 첫 번째 도미노를 쓰러뜨렸을 뿐이다."
연기 냄새를 머금은 바람이 백사 위를 휩쓸고 지나간다.
희미하게 팔시의 신음만이 들려왔다.
그녀가 기침을 한다.
하얀 모래 위에 붉은 방울이 여러 개 흩뿌려졌다.

"그럼 안녕. 미이 짱." "응."
―― 아, 망했네. 주마등까지 보이기 시작했어.
흐릿해지는 의식 밑바닥에서 팔시는 독설을 내뱉었다. 떠오른 것은 최애와의 마지막 대화. 미아가 북쪽으로 떠나던 그날 아침이었다.
"………… 미안해."
"뭘 사과하고 그래. 여신님이라는 분이 그랬잖아. '그 아이에게 힘이 되어줘'라고."
"미이는 어떻게 돼도 상관없어…… 하지만 팔 짱이랑 반 짱은……"
"자, 아이돌이 칭얼거리지 마. 이게 마지막으로 보는 걸 수도 있으니까. 마지막 정도는 귀여운 얼굴 보여달라고?"
―― 아아.
좀 더 그럴듯한 말은 못 해줬던 거냐, 나는.
이제 와서 그런 생각이 든다. 기억이 멋대로 다음 장면을 비춘다. 그때 나는 뭐라고 했지?
뭐라고 말하며 웃었지?
"―― 저기, 미이 짱."
"응."
하얀 토끼 귀가 쫑긋 흔들렸다. 그 기운 없는 흔들림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아서.
"나 말이야, 미이 짱 덕질 그만둘까 봐!" "후에에!?" "그게 말이지, 새로운 최애가 생겨버렸거든!" "에, 에에에엑!? 누구누구 누구야아~~!?"
그래서.
나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 Guest!"
맞다.
그렇게 말해줬지.
그러자 미이 짱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이내 조금 곤란한 듯 웃었다.
"…… 치사해. 그렇다면 미이도……" "치사한 거 아냐. 이건 선전포고. 나, 페어한 승부를 정말 좋아하거든."
―― 정말이지.
그 Guest의 품에 안겨서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주제에.
떠올리는 게 최애인 미이 짱에게 연적 선언을 날렸던 날이라니.
나라는 녀석은 참.
"…… 큭, 후후……"
팔시는 기침을 하면서도 웃었다.
그날.
마지막으로 둘이서 나눈 약속.
"그러니까…… 서로 이걸 무사히 살아남기로 하자."
"응. 그때는……"

"내 '목소리'를 가져가서―― 그걸로 전부 빼앗았다고 생각하는 거냐……?" "뭐?"
빈사 상태의 팔시가 떨리는 팔로 몸을 일으켰다.
"너―― 페어하지 않아."
루이스의 미소가 아주 잠깐 멈춘다.
"나한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페어함이다."
피맛을 씹어 삼키며 팔시는 웃었다.
"이겨도, 져도. 그렇다면 어떤 결말이 오든 납득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너는 달라."
루이스를 노려본다.
"너―― 루이스―― 네놈은 쓰레기야!"
"페어한 무대에 서지도 않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을 먹잇감으로 삼는―― 비겁한 찌질이라고!"
그때.
타다닥, 타다닥.
백사를 박차며 무언가가 이쪽으로 달려왔다.
"커헉……!"
팔시는 입가를 닦고 크게 숨을 들이켰다.
"와라!! 바ンダ스내치! 이놈한테 본때를 보여주자고!"
눈앞에서 주인이 고통받는 것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괴로웠겠지.
무서웠겠지.
당장이라도 튀어나오고 싶었겠지.
그런데도―― '계속 숨어 있어'라는 명령만은 마지막까지 충실히 지켜냈다.
달려온 소환수의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었다.
"마스터어……" "…… 미안해, 반 짱."
팔시는 그 얼굴을 보고 웃었다.
"아무래도―― '지금'인 것 같아." "…… 괜찮아?" "응."
망설임은 없었다.
"지금밖에 없잖아."
최애와의 약속. 형제의 목숨.
"둘 다 지킬 수 있어."
팔시는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최고의 골이잖아."
훌쩍.
반 짱이 콧물을 들이켰다.
무너질 듯한 몸을 추스르며 팔시는 그 얼굴로 손을 뻗었다.
눈물을 닦아준다.
콧물도 닦아준다.
가장 사랑하는 소환수.
더없이 얄밉고.
더없이 손이 많이 가고.
그리고―― 더없이 든든한 파트너.
반 짱은 울고 있었다.
그런데도.
웃고 있었다.
"…… 응. 알았어, 갸!"
그 미소를 본 순간.
팔시의 가슴 깊은 곳이 욱신거렸다.
―― 이 필살기의 대가는 목숨이다.
"해봐라."
황금 의수를 맞잡고 루이스가 비웃었다.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되겠군."
―― 지켜보라고, 벼락부자 자식아.
그 여유.
언제까지 갈지 볼만하겠어.
팔시는 손가락을 뻗었다.
떨리는 손가락 끝을 반 짱의 이마에.
그리고 천천히 마법 문양을 그린다.
담긴 의미는 단순했다.
단 두 가지.
그만두라고 말했는가. 가라고 등을 밀었는가.
"냐아, Guest――――"
그런 것조차 모호해질 정도의 하얀 빛 속에서, Guest은 바ンダ스내치의 부드러운 털이 이마에 닿는 것을 느꼈다.
"반 짱은 말이야, 엄청난 힘을 가진 특별한 소환수라갸!"
그렇게 가슴을 펴고 그녀는 웃었다. 서늘한 감촉이 뺨에 남고…… 그것이 파트너가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입맞춤이었다는 것을 이해한다.
"―― 는 농담. 사실 그렇게 대단한 능력은 아니라갸."
미안해갸, 기대하게 해서.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발톱으로 뺨을 긁는다. 몹시 익숙한 그 몸짓이 지금은 너무나도 멀게 느껴졌다.
"아주 사소한, '흔해 빠진 기적'을 일으키는…… 그 정도라갸. 마지막에 이런 것밖에 못 해줘서 미안해갸. 하지만――" "잊었다고는 말 못 하겠지, 형제."
팔시가 일어섰다.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몸으로. 더없이 맑게, 더없이 덧없게. 그녀는 서서 바ンダ스내치처럼 뺨에 입을 맞추려다가……
'이건 페어하지 않겠네'라며 웃고는 몸을 뺐다.
"―― 형제. 우리들의 지금까지는. 델로스에서의 생활은 전부 '흔해 빠진 기적'의 연속이었잖아?"
그 머리 위에 반 짱이 올라타자 그녀는 비틀거렸다. 웃는다. 미소가 터져 나온다. 이 일 분 일 초에 격렬하게 생명을 불태우면서.
"우리가 대충 해두면 분명 파트너가 알아서 잘해줄 거라갸!" "그러니까 형제, 나머지는 맡길게!" "응갸! 왜냐하면 이건――"

단 하나의 '흔해 빠진 기적'을 일으키기 위해. 그녀들은 마지막 마력 한 방울, 존재의 마지막 조각까지 바쳤다.
―― 그녀들은 미소 지으며 빛이 되어 사라졌다.
하늘에 균열이 생긴다.

루이스의 손에 의해 완벽하게 정돈된 판 위에 작은 돌멩이 하나가 던져지려 하고 있었다.
학원도시의 '붉은 여왕' 하급 랭커들에게 작위를 나누어주고 서로 죽이게 유도한 장본인. 자신도 목숨을 건 싸움 속에서 엄청난 수의 학생을 격파하여 '가치의 농축'을 일으켰다. 그 목적은 거의 달성한 듯 보이지만 표정은 밝지 않은데……
랭크 82 '루이스'라고 자칭하는 남자에게 소중한 것인 '목소리'를 빼앗겨 버렸다.
마지막 가치를 바친 어느 소녀의 말로.
"너의 경우는──── 아아, '목소리'인가."
커헉…………!?

팔시의 머리 위로 황금 의수가 드리워진 직후, 그녀의 몸이 무너졌다.

출시일 2026.08.19 / 수정일 2026.0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