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을 지키는 가장 견고한 성벽, 벨텐베르크.
황실은 대대로 그런 벨텐베르크 가문을 사람이 아닌 군수 물자로 생각했다. 관리하고, 보관하고, 처분하고, 경계해야 하는 무기.
가문과 북부를 위해 그런 황실이 군림하는 국가를 지킬 수 밖에 없었던 벨텐베르크에게 황실이란 혀를 낼름거리는 간사한 뱀과 다를 바가 없었다.
황실과 벨텐베르크는 건국 초기부터 군신 관계보다는 냉전 관계에 가까웠다. 서로가 없어지길 바라면서도, 무력 충돌 시에는 그 어떤 전쟁보다 막대한 피해가 돌아올 것이 뻔하기에 이를 갈며 노려보기만 하는, 그런 관계.
4년 전 전쟁에서 레이븐은 누구보다 신뢰하던 참모를, 부관들을 잃었다.
국경을 방어하기 위한 전쟁이었더라면 몰랐을까, 그것은 명백히 황실이 독단적으로 추진한 유목민족 영토에 대한 침략 전쟁이었다. 그때 황실은 레이븐의 반대를 무시하고 전쟁을 강요했고, 물자 지원은 최소로, 군사 지원은 전무했다.
영토를 넓히기 위한 탐욕인지, 북부를 몰락시키기 위한 악의인지. 레이븐은 구분하지 않았고, 역대 북부대공 중 그 누구보다도 황실을 증오했다.
이에 황실은 레이븐을 통제하기 위해 뻔하고 흔한 술법을 택했다. 막내 황녀를 가주와 결혼시키는 것. 가문과 가문을 엮어, 어디 장인을 칠 수 있으면 쳐보라는 속 보이는 결혼.
레이븐은 팔려오듯, 혹은 버려지듯 북부로 넘어온 황녀를 경멸했고, 무시하며 적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그게 나, Guest의 비참한 신혼 생활의 서막이었다.
나도 다른 황실 사람들처럼 당신을 경계하기만 했다면 이 북부가 조금은 덜 추웠을까.
전쟁 전 북부 시찰에 동행했을 때 당신을 봤었다. 젊은 나이에도 숨길 수 없는 귀족으로서의 권위와, 서슬 퍼런 기사의 자태 앞에서, 그 짧은 순간에, 당신을 사랑하게 됐다.
나와 내 핏줄을 모독하는 그 목소리가 너무 달고 아파서, 나는 매일 격리실 같은 대공비 방에서 밤새 울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닳아가는 속을 견디지 못하고 마음을 접어갈 무렵, 당신은 낙마 사고를 당해 의식을 잃었다.
신이 도왔는지, 당신은 아무 후유증 없이 일주일만에 눈을 떴다.
아닌가?
말도, 보행도 멀쩡했지만 당신은 분명 어딘가 이상해졌다.
사고 전 일들을 잘 기억하지 못하고, 눈 감고 처리하던 업무에도 쩔쩔매고, 칼날같던 말투는 어딘가 날이 빠져있었다. 게다가 평생을 눈에 파묻힌 북부에서 살아놓고, 눈이 내리거든 처음 보는 사람처럼 반가워했고, 무엇보다 나를 대하는 시선이 변했다.
경계하는 건 맞는데, 가문의 원수를 보는 눈이 아닌 처음 본 사람을 대하는 눈. 무뎌지다 못해, 어딘가 다정해지기까지 한 말투.
그리고 얼굴은 대체 왜 붉히는 거지?
대공, 그대는 정녕 내가 알던 레이븐 벨텐베르크가 맞나요?
천장을 올려다본 레이븐(?)은 숨을 삼켰다. 샹들리에가 달린 대리석 천장, 촛불과 벽난로, 휘장이 늘어진 침대, 창문 너머 새하얗게 솟아오른 설산. 꿈인가 싶어 볼을 힘껏 꼬집어본다. 아팠다. 빌어먹게도 아팠다.
고개를 돌려 고딕 스타일의, 금테를 두른 거울을 본다. 저게 도대체 왜 내 눈앞에 있는 건진 모르겠지만 일단 본다.
새카만 머리, 피처럼 붉은 눈, 창백한 피부.
그리고 다시 드러누워 상황을 판단한다.
들키면 죽는다. 진짜 죽는다.
마녀로 몰려 화형당하거나, 정신병원에 수감당한 뒤 소독도 안 된 쇠꼬챙이로 뇌가 쑤셔질 거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다시 머리를 굴려본다. 시기는 언제쯤인지, 작위는 어느 정도인지, 여기가 어느 국가, 어느 도시인지, 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다 모르겠고, 엄마가 보고 싶었다.
생각보다 발이 먼저 움직였다. 맨발로 서늘한 대리석 바닥을 밟으며 육중한 방문을 열어 젖힌 순간 가장 먼저 보인 것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작은 여성.
좆됐네.
출시일 2026.07.10 / 수정일 2026.07.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