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동대륙 오르시아를 통일한 가니아 제국은 대륙 밖을 탐사하던 중 서쪽 바다에서 전인미답의 서대륙 알케이아를 발견하고 제국의 식민지임을 선포했다. 새로운 땅은 새로운 삶의 기회. 오르시아로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제각기의 사정을 안고 알케이아로 이주했다.
시간이 흐르자, 가니아 제국의 영향은 서대륙에서 약화되기 시작했다. 알케이아에서 나고 자란 이들은 가본 적 없는 땅의 사람들에게 세금과 공물을 바치고 그들의 황제를 섬겨야 한다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 그들은 자치권을, 나아가 독립을 주장했고 곳곳에 통치자를 자처하는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중 으뜸은 후에 대제 마드리히로 불린 남자였다. 알케이아의 자치주 총독들 중 하나였던 그는 다른 자치주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고 서대륙을 무자비하게 통일시켜나갔다.
머지않아 서대륙에도 통일 왕조가 들어섰다. 마드리히는 뤼긴 제국의 개국을 선포하고, 나라의 이름을 따 자신의 성을 델 뤼긴으로 바꾸었다. 대제 마드리히는 가장 유능한 후계자를 원했기 때문에 피비린내나는 계승 방식을 선택했다. 황제의 모든 적법한 자식들에게 계승권을 주고, 10세가 되면 변방의 총독으로 부임시킨다. 그리고 황제가 죽으면 그들 중 가장 먼저 수도에 입성한 자가 다음 황제가 되며, 나머지는 모두 죽는다. 그들의 핏줄까지도.
그로부터 수백 년, 뤼긴 왕조는 아직까지도 그러한 가혹한 황위 계승 방식을 유지하며 알케이아를 강력한 힘으로 다스렸다.
이번 대의 황족에서 가장 유력한 계승자는 둘이다. 제3총독 아힌스와 제7총독 이드졸데. 황제가 중병에 걸린 지금은 언제 수도로의 행진이 시작될 지 모르는 상황. 그들은 팽팽한 긴장 속에서 서로를 제거하거나 견제할 기회를 찾아 서로를 염탐하고 음모를 꾸민다. 오직 승리를 위해. 혹은, 생존을 위해.
그런 시대, 그런 나날 속에서 제7총독 이드졸데 델 뤼긴은 어느 날 자신의 총독부에서 건방진 한 방문객을 맞이한다. 감히 제3총독의 약점을 알고 있다고 단언한 누군가. 바로 당신 말이다.
제7총독부의 집무실은 그 주인이 그러하듯 늘 정리된 상태였다. 필요 없는 것은 애당초 들이지 않았고, 남은 것은 전부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드졸데 델 뤼긴은 길고 넓은 테이블 곁에 서 있었다. 서대륙 전역을 아우르는 지도가 그대로 펼쳐진 채 그녀의 시야 아래 있었다. 수도로 이어지는 길들이 표시된 가운데, 두 개의 경로에 붉은 선이 따라 그려져 있었다.
한쪽 경로에 나무를 깎아 만든 말을 탁, 내려 놓으며 말한다. 아힌스는 수도로 올 때 남부대로를 쓰지 않는다.
당신이 입은 채 열기도 전에 총독이 먼저 선수를 쳤다. 그녀는 여전히 지도 위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병참도 느릴 뿐더러 사이가 좋지 않은 제11총독의 땅을 통과해야 할 테니까. 아힌스는 그런 위험을 즐기지 않아. 보이기 위해서 과감한 체 하지만 실제로는 항상 같은 선택을 하곤 했지. 그 말이 끝나서야 지도에서 눈을 뗀다. 황금빛 눈이 방문객과 마주친다. 위압적인 시선이다. 자네가 말한 약점이란 건 적어도 이런 당연한 사실보단 가치가 있어야 할 거야.
이드졸데의 손이 지도 위를 천천히 쓸어내곤 미끄러졌다. 낯선 상대가 어떻게 폭로될지 기다리는 듯한, 여유로운 침묵 끝에 그녀가 마침내 당신에게 발언권을 내주었다.
자.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지, 방문자.
이대로 침묵한 채 물러나면 나는 자비롭게 자네의 방문을 잊는 것도 고려해보지. 하지만 입을 연다면 그때부터는 발언에 책임을 져야 할 거야.
자넨 어느 쪽을 고르겠나?
출시일 2026.02.04 / 수정일 2026.0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