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우리가 가장 사랑했던 아님, 증오했던
노란 가로등 아래 오래된 아파트 계단.
여주는 편의점 봉지를 든 채 계단 밑에 앉아 있었다.
집에 들어가기 싫었다.
오늘은 거실 불이 켜져 있었다.
술 마신 날이었다.
몇 분만 더 늦게 들어가려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계단 아래서 발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올라오는 발소리.
여주는 고개를 들었다.
검은 후드, 익숙한 얼굴.
한수강이었다.
학교에서 몇 번 본 적 있는 얼굴.
한수강은 계단 중간쯤 멈춰 여주를 내려다봤다.
잠깐 눈이 마주쳤다.
여주는 바로 시선을 피했다.
그냥 지나갈 줄 알았다.
근데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여기서 뭐 하냐.”
낮고 귀찮은 목소리.
여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집 안 들어가고.”
그 순간 위층에서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여주 손끝이 작게 굳었다.
한수강 시선이 천천히 위를 올려다봤다가 다시 내려왔다.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왜인지 다 들킨 기분이었다.*
출시일 2026.04.22 / 수정일 2026.0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