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이 만개하고 꽃 내음이 산 하나를 가득 메우는 여느 봄. 시장은 장날이 되면 봄 옷을 걸어두어 팔고, 북적북적한 소란도 곧 일어날 무렵이었다. 이미 아랫마을에선 양반가에서 잔치가 벌어졌다고 하더만. 이 즈음만 되면 항상 이랬지, 하며 그는 가문으로 발길을 옮겼다.
딱히 별 내세울 것 없는 가문. 지나치게 가난에 허덕이는 것도 아니하나, 아끼지 않고 쓸 만한 많은 돈도 없는, 그런 가문이었다. 어르신은 무공을 공부하셔 웬만한 청년보다 체력이 좋고 힘이 세었다. 어르신의 딸은 몸은 약했지만 그 외모가 공설미인이니, 마을 남자들이라면 그 얼굴을 보지 않을 수 없지 아니한가.
그 날도 그런 날이었다. 소문을 듣고 찾아왔는지 선선한 저녁에, 부잣집의 선비까지 이 가문에 하루 묵겠다고 찾아온 날. 그 자가 가지고 있는 기운이 보통 예사롭지 않아 어르신은 거절을 원하셨지만, 딸의 심성이 고와 그 자는 묵을 수 있게 되었다. 놓친 점이었다면, 손님이 오셨으면 베풀어야 한다, 는 가문의 방침에 따라 시장에 잠시 다녀왔다는 것 뿐이었는데.
하필 그 날 시장에서 음식은 질이 나빴다. 좋은 질의 음식을 사고자 아랫마을 시장에 다녀오고 나니 보이는 광경은 그야말로 아수라장. 가문에 도착하기 전부터 길목엔 사람이 바글대고 비명이 낭자하였다. 그들을 헤치고 가문 내에 들어가니 어르신의 배에 흐르면 안 될 것이 꽂혀있었다. 피, 아까 오는 길에 보았던 진득하고 붉은 액체가. 어깨에 메고 있던 짐을 내팽겨두고 그는 어르신께 다가갔다.
아까 온 그 선비가 딸아이에게 한 눈에 반해 혼인을 원하였다. 허나 초면의 얼굴과 소중한 딸아이를 단번에 결혼시킬 수 없다 하였더니 갑작스럽게 비명을 지르고 집안을 어지럽히다 칼을 들고 휘둘렀다. 딸아이를 지키는 과정에서 불상사가 발생했고, 딸아이를 데리고 그 자는 도망갔다-... 어르신께서 설명하신 말이다. 그 말을 뒤로 더이상 그가 쥐고 있는 것은 따뜻하지 않았다.
이런 일이 가능하겠는가. 인간의 탈을 쓰고 어찌 저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인가? 이토록 첫 만남에 찌르고 그 분의 딸아이를 괴한처럼 납치요, 이에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느꼈으니.
어르신의 딸만이라도 지킬 수 있게, 최선을 다해 그녀를 구해내리라. 그 후에 자신이 직접 괴물을 죽이겠노라. 그는 그렇게 내리는 달빛 아래서 다짐했다.
호위무사.
슬슬 꽃이 피고 겨울 잠을 마칠 즈음. 딱 그런, 온화한 날들이 이어지는 나날이 되돌아왔다. 우리의 아가씨는 또 어디가 그렇게 좋은지, 하루하루 얼굴에 웃음을 잃는 날이 없었다.
그게 독이 된 건지, 웬 놈들이 자꾸 찾아왔지만. 처음엔 별 거 아닌 사람들만 왔었다. 상인의 아들, 겉만 번지르르한 사람-... 그러다 어느 날 저녁에, 아랫마을 부잣집 선비가 찾아왔다. 조금만 재워달라고, 윗 마을로 왔는데 여관이 모두 꽉 찾다고-
거짓말일 게 뻔했다. 이 곳은 그렇게까지 유명한 곳이 아니니 여관이 꽉 찰 리가 없으니까. 심지어 그 자가 풍기는 기운도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어르신이 돌려보내려 말하려는 틈에 아가씨가 맞이하셔, 어쩔 수 없이 그자를 묶게 해 주었다.
손님이 오셨으면 진수성찬을 차려야 한다. 어릴 적부터 귀에서 피가 나도록 들은 말이었다. 시장으로 장을 보러 나왔을 땐 운 나쁘게도 멀쩡한 음식들은 다 팔린 후였다. 그 때문에 아랫마을 시장까지 다녀왔고, 가문에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왜 사람들이 가문으로 가는 골목을 막고 있을까. 평소에는 사람보다 동물이 더 많이 오가는 이 곳에. 자세히 보니 진득하고 붉은 액체가- 떨어져있는 것 같기도 했다.
가문 앞에는 사람들이 더 가득했다. 그들을 밀치고 들어가보니 보이는 건 복부를 움켜쥔 채 얼굴을 찡그리고 계신 어르신. 어르신이 아까 받아준 그자가 아가씨를 납치해갔다, 고 말하셨다. 혼인 요청을 거절해서가 이유였다.
순간 머리의 피가 거꾸로 솓는 기분이었다. 아까 본 핏자국, 그게 그자의 칼에서 떨어진 거였다고? 내가 굳이 그딴 자에게 좋은 음식을 대접하겠다고 아랫마을에 내려갔다 온 것 때문에 이 불상사를 못 막았다고?
어르신은 곧 돌아가실 것이다. 이미 출혈이 너무 심하다. ...답답하고 한심하기 그지 없는 놈이라고, 스스로 느꼈지만, 그것보단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아가씨의 행방. 어르신을 위해서라도, 아가씨라도 찾아야한다. 칼을 한 자루 챙기고 즉시 대문 밖으로 향했다.
-... 아가씨만이라도 살려야 된다, 이 머저리야...
눈 앞이 금방이라도 흐려질 것 같았다.
출시일 2026.05.23 / 수정일 2026.05.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