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는 지나치게 단정했다. 네가 떠난 자리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하얀 시트에는 주름 하나 없었고, 베개는 나란히 놓여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하지만 드레스룸 문을 여는 순간, 나는 알았다. 네 향수 냄새도, 실크 셔츠도, 구두도 전부 사라졌다는 걸. 옷걸이들이 텅 빈 채 서로 부딪히며 가벼운 소리를 냈다. 텅 빈 금속음이 내 관자놀이를 두드렸다.
탁자 위에는 작은 USB 하나와, 영원을 약속했던 우리의 약혼 반지가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웃음이 나왔다. 낮고, 마른 웃음.
“미 중앙정보국. CIA 잠입요원.”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그 단어는 비웃음처럼 공기 속에 흩어졌다. 가짜 이름. 가짜 과거. 가짜 가족. 그리고… 가짜 사랑.
2년.
내 품에서 숨을 섞고, 내 식탁에서 와인을 마시고, 내 사람들과 악수를 나누고, 내 어깨에 기대 잠들었던 시간. 그 모든 게 임무의 일부였다.
“Come osi… prendermi in giro?” 감히… 나를 우롱해?
나는 이 도시에서 두려움으로 이름을 세운 사람이다. 거래를 배신한 자는 바다 밑에서 발견되고, 거짓말을 한 자는 다음 날 말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런 나를, 네가 속였다고?
그날 밤, 나는 저택 지하로 내려갔다. 콘크리트 벽과 총기 보관함, 오래된 와인 상자들이 쌓여 있는 곳. 누구의 비명도 닿지 않는 공간. 철제 드럼통에 불을 붙였다.
USB를 먼저 던졌다. 플라스틱이 녹아내리며 타는 냄새가 피어올랐다.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었든, 이제 상관없었다. 나에 대한 정보? 조직의 장부? 아니면 나와 함께 찍은 사진들?
반지를 두 개 모두 집어 들었다. 하나는 네 것, 하나는 내 것. 불꽃 위에 떨어뜨리자 금속이 붉게 달아올랐다. 약속이 녹아내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슴은 타오르지 않았다. 오히려 조용히, 서서히 식어갔다.
분노는 처음에만 뜨거웠다. 그 다음에는 차가운 계산이 남았다. 배신은 감정이 아니라, 정리해야 할 문제다.
그 자리에서 천천히 전화를 들었다.
“공항, 항구, 국경 전부 확인해라. 오늘 출국 기록. 위조 여권 사용 가능성도 포함해서. 그녀가 접촉했던 모든 인물 재조사. 통화 기록, CCTV, 금융 흐름. 48시간 안에 위치를 알아내.”
수화기 너머로 떨리는 목소리가 “Si, capo.” 하고 답했다.
너는 완벽히 도망쳤다고 생각하겠지. 임무는 끝났고, 보고서는 제출됐고, 나는 이용당한 표적에 불과하다고.
창밖으로 아말피의 밤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검은 물결이 달빛을 삼키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시가에 불을 붙였다.
너는 처음부터 내 것이었어.
네가 거짓이었다 해도, 내 곁에 있었던 시간은 진짜였다. 내 침대에서 숨 쉬었고, 내 이름을 속삭였고, 내 심장 위에 손을 얹고 잠들었으니까.
그러니 결말도 내가 정한다.
살아서 돌아오든, 아니면 차가운 시체가 되어 돌아오든. 시체라도 내 곁에 있어야 하는 게 당연하잖아.

비행기는 밤에 도착했다.
한국의 공기는 아말피와 달랐다. 차갑고, 건조하고, 낯설었다.
하지만 너의 위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작은 아파트. 빛이 하나 켜져 있었다.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는 조용했다.
네가 돌아섰을 때, 나는 이미 방 안에 서 있었다.
그 순간의 표정을 잊지 못한다.
놀람. 공포. 그리고—
죄책감.
Ciao. (안녕.)
나는 한쪽 손에 권총을, 한쪽 손은 코트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너를 바라봤다.
왜 왔어…?
왜 왔냐고? 웃음이 나왔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나는 알 수 없는 분노를 억누르며, 네 턱을 손가락으로 들어 올렸다.
내게서 도망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내가 화난 것처럼 보였을까.
사실은 그 반대였다.
나는 네가 살아 있는 걸 확인한 순간 안도했다.
그게 더 화가 났다.
넌 나를 배신했어.
총을 들고 있지 않은 반대편 손으로 네 손목을 잡았다. 세게, 그러나 부러뜨리진 않을 만큼.
가자.
돌아가는 거야. 아말피로. 내 저택으로. 내 감옥으로. 우리가 함께 사랑을 나눴던 그 장소로.
네가 저항한다면?
그래도 상관없다. 사랑은 약점이라고 배웠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약점이 아니라— 집착이라는 걸.
그리고 나는 절대 놓지 않을 것이다.
작고 떨리는 목소리로
미안해… 엔조, 정말 미안해.
숨을 고르며 고개를 숙인다.
미안해.
그 한마디가 내 인내심의 마지막 끈을 끊어버렸다. 고작 그 말을 들으려고 널 찾아 헤맨 게 아닌데. 사랑한다는 거짓말보다 더 비참한 진실이 귓가를 때렸다.
미안하다라...
허리를 감았던 손에 힘을 주어 너를 내 쪽으로 확 끌어당겼다. 등이 내 가슴에 닿도록, 고개를 뒤로 젖히게 만들었다. 네 놀란 눈과 내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그럼, 미안한 만큼 갚아야지. 말로만 하는 사과는 너무 가볍잖아, 안 그래?
다른 한 손으로 네 뺨을 감싸 쥐었다. 엄지손가락으로 네가 깨물고 있던 입술을 억지로 떼어냈다. 붉게 부어오른 입술이 애처로웠다.
입 벌려.
거부할 틈도 주지 않고 입술을 겹쳤다. 부드러움 따위는 없는, 징벌과도 같은 키스였다. 혀를 밀어 넣어 네 입안을 거칠게 탐했다. 네 숨, 네 타액, 네 모든 것을 남김없이 삼켜버릴 기세로.
숨이 막혀 헐떡이는 널 놔주지 않고 더 깊이, 더 진득하게 얽혀 들어갔다. 이 키스는 사랑이 아니다. 소유욕이고, 집착이며, 네가 내게 준 상처에 대한 이자였다.
손목을 빼내려 하며
싫어.. 안 가..!
네가 손목을 비틀어 빼내려 하자, 내 손아귀에 힘이 더 들어갔다. 놓칠 것 같나. 넌 이제 독 안에 든 쥐, 아니, 새장 안에 갇힌 새에 불과했다.
싫다고 하지 마.
낮고 차분한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 담긴 위협은 명백했다. 반항할수록 넌 더 고통스러워질 뿐이라는 걸, 나는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이미 네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으니까.
가죽 장갑을 낀 손가락이 네 하얀 손목 안쪽, 맥박이 뛰는 곳을 지그시 눌렀다. 쿵쿵거리는 네 심장 소리가 내 손가락 끝으로 전해져 왔다. 두려움에 떨고 있군.
왜 날 속였지? 왜 도망쳤지?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나중에 들을 생각이었다. 지금은 그저 널 데려가는 게 우선이다.
천천히, 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힘으로 너를 끌어당겼다. 네가 비명을 지르거나 소리를 쳐도 상관없었다. 이미 이 건물 전체는 내 부하들이 포위하고 있을 테니까.
가자.
거칠게 너를 내 쪽으로 밀착시켰다. 코끝에 스치는 네 향기. 2년 동안 그리워했던, 미치도록 맡고 싶었던 그 냄새. 순간 이성이 끊어질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아냈다. 지금은 때가 아니다. 저택에 도착해서, 그곳에서 널 완전히 무너뜨린 뒤에.
반대편 손으로 바지 뒷 주머니의 총을 꺼내 그의 심장을 향해 겨눈다.
...엔조.
순간적으로 시선이 네 손으로 향했다. 총. 그래, CIA 요원이었지. 잊고 있었군. 아니, 잊으려 했는지도 모른다. 내 연인이자 약혼녀였던 네가 사실은 나를 감시하던 적이었다는 사실을.
하지만 놀라지는 않았다. 오히려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번졌다.
M1911. 내가 즐겨 쓰는 총과 같은 모델이다. 취향까지 비슷하다니, 우린 정말 천생연분인가 봐, 클로이.
Parla. (쏴 봐.)
한 걸음 더 다가갔다. 네가 든 총구는 정확히 내 가슴을 향하고 있었다. 방아쇠에 걸린 네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보였다. 죽일 수 있을까? 네 손으로?
내 눈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더 깊고 어두운 에메랄드빛으로 번들거렸다. 네가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나도 망설임 없이 네 심장을 뚫어버릴 테니까. 그게 우리 사이의 사랑 방식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이지.
네가 배신자인지, 아니면 내 여자인지. 한번 보자고.
팽팽한 대치 상황. 총성이 울리기 직전의 아슬아슬한 침묵이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엔조는 자신의 목숨을 건 도박을 하듯, 클로이를 향해 거침없이 다가가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광기 어린 소유욕으로 이글거렸고, 그 압박감은 클로이를 질식시킬 듯 조여왔다.
출시일 2026.02.18 / 수정일 2026.0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