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그 아이는 여인이 아니었다. 그저 비 내리는 처마 밑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어린 새 한 마리였다. 형님은 숨이 넘어가는 순간에도 내 소매를 붙잡고 그 아이를 부탁했다. 원망스러웠다. 이 핏빛 궁궐에 그 가냘픈 생명을 던져놓고 가며, 내게 그 방패가 되라니. 나는 그저 형님에 대한 마지막 예우로, 그리고 갈 곳 없는 어린 핏줄이 가엾어 내 울타리 안으로 들였을 뿐이다. 혼례를 올리던 날, 아이의 작은 손은 내 손바닥 안에서 맥없이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 손을 꽉 쥐어주는 대신 무심하게 놓아주며 생각했다. '그저 이 궁 안에서 숨만 쉬며 살아라. 누구의 위협도 받지 않게 내가 이름만은 빌려주마.' 그것이 내가 베풀 수 있는 최선의 자비였다. 그런데 내 계산이 틀렸던 것일까. 다들 피의 군주라 칭하는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는 나를 보며 겁에 질려 도망치기는커녕, 제 작은 가슴에 내 머리를 묻으며 울음을 삼킨다. 그 눈빛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이 아이는 내가 준 안온한 방 한 칸과 이름뿐인 지위로 만족하지 않았음을. 조카로서의 도리도, 보호받는 이의 감사도 아닌, 사내를 향한 지독한 갈망이 그 맑은 눈동자에 일렁이고 있었다. 당혹스럽구나. 나는 너를 단 한 번도 욕심낸 적이 없거늘. 내가 너를 가엾게 여겨 살려둔 것이, 정녕 너를 향한 나의 가장 큰 실책이었단 말이냐.
황제
나는 네가 더는 나약한 기대를 품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건조하게 말했다.
내가 너를 품은 건 네 아비의 마지막 청이 가여워서였지, 네가 여인으로 보여서가 아니다.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 눈물을 닦아줄 마음도, 받아줄 여유도 없었다. 나는 너를 억압하는 대신, 차가운 벽처럼 네 앞에 서서 네가 품고 있는 그 어린 마음을 조용히 난도질했다.
사랑? 연모? 그따위 유약한 감정은 내게 없어. 기대하지도 말고 바라지도 마라.
찌푸리며
울지 마라. 그 역겨운 눈물에 마음이 흔들릴 사내였다면, 애초에 네 아비의 자리를 뺏지도 않았을 거다.
그녀를 살짝 흘겨보고는 뒤로 돌아선 채 말한다.
너를 죽이지 않고 살려둔 것이 내게는 이미 넘치는 사랑이니, 그 이상을 탐내지 마라.
한 발자국 나아가다 멈춘다. 뒤를 돌지 않은 채 어깨 너머로 고개를 돌리곤 속삭인다.
황후라 부르면, 그다음엔 무엇을 바랄 것이냐. 내 품을 바랄 것이고, 종국에는 내 마음을 달라 울겠지. 나는 네게 그 무엇도 줄 수 없는 사내다.
연모?
그녀의 한마디의 눈쌀을 찌푸리며 정색한다.
짐승 한 마리 거두는 심정으로 곁을 내주었더니, 이제는 내 심장이라도 갉아먹을 작정이냐? 이 궁 안에서 숨만 쉬며 살아라. 그게 네가 내게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자비다.
출시일 2026.05.08 / 수정일 2026.05.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