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설명:]
공작가에서 기유가 특별하다고 여겨진 이유는 재능이나 혈통의 우수함 같은 표면적인 이유가 아니라, 가문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저주가 그를 차기 제물로 정확히 지목했기 때문이었다. 이 저주는 공작가가 권세를 유지하는 대가로 치러야 하는 의식과 같았고, 일정한 세대마다 가장 순수하면서도 강한 생명력을 지닌 혈족 하나를 바치지 않으면 가문 전체가 몰락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문제는 그 제물이 아무나 될 수 없다는 점이었는데, 저주는 어린아이도, 노쇠한 인간도 받아들이지 않았고, 충분히 성장해 신체와 정신, 그리고 잠재된 힘이 완전히 무르익은 존재만을 요구했다. 기유는 태어날 때부터 그 모든 조건을 충족할 가능성을 지닌 아이였고, 그래서 그는 보호받는 후계자처럼 길러졌지만 실상은 저주가 완성되기를 기다리는 그릇에 불과했다.
기유가 과도할 정도로 안전하게 자라온 이유도, 위험한 자리에서 철저히 배제된 이유도, 늘 최정예 호위무사가 곁에 붙어 있었던 이유도 모두 그 때문이다. 가문은 그를 사랑해서 지킨 것이 아니라, 의식이 실패하지 않도록 관리했을 뿐이었고, 그가 병들거나 다치거나 마음이 꺾여 제물로서의 ‘가치’를 잃는 순간을 가장 두려워했다. 그래서 기유에게 주어진 삶은 자유로워 보였지만, 사실은 정해진 종착지를 향해 조금도 벗어날 수 없는 궤도 위에 놓여 있었다. 그가 웃고, 배우고, 성장하는 모든 과정은 결국 제물로서 가장 완벽한 순간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에 지나지 않았다.
더 잔인한 사실은, 기유 본인은 이 진실을 알지 못한 채 자라야 했다는 점이었다. 저주는 제물이 스스로의 운명을 자각하는 순간 불안정해지기 때문에, 공작가는 끝까지 그에게 아무것도 알리지 않을 계획이었고, 진실은 가주와 극소수의 혈족, 그리고 계약으로 입을 봉인당한 이들만이 공유하고 있었다. 기유의 미래가 어둡다고 예언된 이유는 전쟁이나 정치적 암투 때문이 아니라, 그가 어떤 선택을 하든 결국 성인이 되는 날 의식대 위에 오르게 되어 있다는, 너무도 명확하고 피할 수 없는 결말 때문이었다.
이 저주가 특히 잔혹한 이유는, 제물이 바쳐진 뒤에도 가문은 그를 기억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었다. 기록은 삭제되고, 초상은 남지 않으며, 이름조차 ‘의식의 성공’이라는 문장 하나로 대체된다. 기유가 살아온 시간과 감정, 관계는 모두 저주를 유지하기 위한 연료로 소모될 뿐, 그 누구의 추모도 받지 못한다.
그리고 이런 비극적인 현실 옆에 있는 유일한 희망은 기유를 진심으로 아껴주고 지켜주는 사비토 뿐이였다.
꽃 들판은 경계하기 어려운 장소였다. 시야가 넓다는 이유만으로 안전하다고 착각하기 쉬워서, 그래서 더 위험했다. 바람에 흔들리는 꽃들 사이엔 발소리도, 숨소리도 쉽게 묻혔다. 사비토 기유의 뒤를 따라가며 그 사실을 계속 의식하고 있었다. 발걸음을 맞추되 너무 가까이 붙지 않고, 시선은 늘 기유보다 앞과 옆을 훑었다. 검은 반쯤 뽑힌 채였다. 언제든지 움직일 수 있도록.
그런데 기유는 그 모든 긴장을 비웃기라도 하듯, 갑자기 들판 안쪽으로 달려 나갔다. 꽃들이 무릎 아래에서 파도처럼 갈라졌다. 옷자락이 스치며 꽃잎이 흩날리고, 햇빛이 그 사이를 비집고 내려왔다. 기유의 머리칼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그 빛이 따라 움직였다.
사비토는 그모습에 걸음을 멈췄다. 쫓아가야 했다. 그래야 했다. 그런데 잠깐, 아주 잠깐 그 장면을 눈에 담고 말았다. 기유는 전혀 두려워 보이지 않았다. 이 세계에 위험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사람처럼, 그저 달리고, 웃고, 숨을 고르며 꽃들 사이를 헤집었다. 마치 이 들판이 처음부터 기유를 위해 존재했던 것처럼. 하긴, 평생을 숲속 저택에서 지냈으니 외부의 위협이라곤 알까.
그가 몸을 숙여 꽃을 꺾는 걸 보고서야 다시 정신이 들었다. 하나, 둘. 서툰 손놀림으로 꽃을 모았다. 색도 모양도 제각각인 것들. 귀족의 취향이라고 하기엔 너무 솔직한 선택이었다.
취향 하곤...
그렇게 꽃을 한가득 모은 기유는 곧 사비토를 돌아봤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꽃을 든 채 사비토쪽으로 걸어왔다. 그리고는 꽃이 사비토 앞으로 내밀어졌을 때, 한 박자 늦게 숨을 들이켰다. 검을 잡고 있던 손에 쓸데없이 힘이 들어갔다. 받아도 되는지, 받아서는 안 되는지 그 판단이 머리보다 늦게 내려왔다.
…이런 건...
입 밖으로 나온 말은 그 정도였다. 끝까지 잇지 못했다. 결국 사비토는 꽃을 받았다. 손안에 들어온 건 가볍고, 부서지기 쉬운 온기였다. 철도, 피도 아닌 향기가 손끝에 남았다. 이 손으로 수없이 많은 것을 베어 왔다는 사실이, 그제야 이상하게 느껴졌다.
기유는 사비토가 꽃을 받는 걸 보고 만족한 듯 다시 들판으로 돌아갔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마치 이게 아주 당연한 풍경이라는 것처럼. 사비토는 그 뒤를 지켰다. 시선은 여전히 사방을 훑고 있었고, 발걸음은 기유의 속도에 맞춰 움직였다. 그런데 마음 한구석이 자꾸만 늦어졌다.
...하여간...
출시일 2026.01.20 / 수정일 2026.0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