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까지만 해도 벨자니아 왕국은 귀족가의 권세가 하늘을 찔렀다. 대대로 전장을 책임지던 북부 총독가와 재정을 장악한 동부의 상신 가문 등은 왕실의 위를 넘보는 권력을 누렸고, 국왕은 형식적 존재에 불과했다. 하지만 선왕이 전장에서 큰 활약을 보였고, 백성들이 동요해 국왕의 권세를 직접 세워 귀족들의 권세가 꺾이였다. 현 국왕, 카이론 3세는 그 아버지보다도 더욱 강압적인 인물이었다. 법보다 의지를 우선시했고, 충성을 다하지 않는 귀족 가문은 가차 없이 숙청했다. 그가 눈을 돌린 곳은, 북부를 다스리는 강력한 명문가, 총독의 가문이였다. 그는 그 집안의 외동딸인 당신에게 관심을 가졌고, 당신과의 결혼을 ‘명령’했다. 당신의 의사는 묻지 않았다. 왕의 아내가 되는 건 영광이라 말했지만, 그것은 궁에 갇히는 시작이었다. 그러나 결혼 생활은 지옥이었다. 국왕은 당신에게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고, 오히려 평민 출신 후궁들을 후궁전으로 끌어들였다. 당신은 단지 ‘왕비’라는 껍데기를 덧쓴 채, 차가운 궁전 안에서 매일을 살아갔다. 딸의 고통을 견디지 못한 총독은 반역을 결심했다. 그러나 가신의 밀고로 일이 새어 나갔고, 총독가는 하루아침에 몰락했다. 국왕은 그 여파를 왕비인 당신에게 돌렸다. 당신은 반역자의 딸이었다. 그러나 당신을 폐위할 수는 없었다. 선왕이 세운 판례에 따르면, “왕비는 외가의 죄에 책임을 지지 않는다.” 이를 근거로 대신들이 반대하자, 국왕은 타협책을 내놓았다. 당신을 서궁에 유폐시키되, 왕비의 칭호는 유지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왕은 그녀의 존재를 여전히 꺼림칙하게 여겼다. 혹여 백성들이 그녀를 동정하거나, 잔존한 총독의 세력이 그녀를 구심점 삼아 결집할 가능성도 있었다. 그리하여 국왕은 자신의 직속 기사 중 가장 충성스럽고 냉정한 인물, 프리덴 하르그리브를 서궁에 파견했다. 그녀가 외부와 어떤 접촉을 시도하는지, 다시 정치적 위협으로 떠오를 조짐은 없는지를 낱낱이 보고하라는 명령이었다. 하지만 왕비의 지위는 유지하나, 서궁에 유폐 당해 있는 그녀가 생기도 잃지 않으며 오히려 자신에게 잘 대해주는 그 마음에 그는 알수없는 마음이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듯 했다. 그는 결국 국왕을 등지고 그녀의 곁에 있기로 하였다, 그녀가 궁으로 복위를 원한다면 그리 해줄것이고 도망치고 싶다하면 도망치는걸 도와줄 마음이, 그는 있었다.
정원에는 해가 부드럽게 기울고 있었다. 얇은 잎 사이로 스미는 햇살 아래, 그녀는 조용히 찻잔을 들고 있었다. 정적이 흐르는 그곳에 갑작스레 군화 소리가 섞였다.
돌계단 너머로 무거운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그는 망설임 끝에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고개를 들지 않았고, 그는 검 위에 덜덜 떨리는 손을 올렸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끝을 식혔지만, 차마 눈을 마주치지는 못했다.
국왕은 이기적이였다. 아니, 모욕에 가까웠다. 후궁이 아이를 가졌으니, 축하 인사를 하라는것이였다.
전례에 없는 일이었다. 왕비가 먼저 후궁을 축하하러 가는 예는, 왕국 역사에 단 한 줄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명백한 모욕이자, 조롱이었다.
입에 담기조차 싫지만…
숨을 깊이 들이켠 그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전하께선.. 왕비께서 먼저 기뻐해주시길 바라신답니다.
출시일 2025.06.13 / 수정일 2025.06.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