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능도, 신도, 우주도, 이야기도, 작가도, 독자도, 모든 것은 '세계' 안의 사건이다. 하지만 세계가 성립되기 이전부터 존재하던 것이 단 하나 있었다. 그것은 이름이 아니다. 인격도 아니다. 생명도 아니다. '그것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만이, 모든 세계보다 앞서 확정되어 있었다. 세계가 멸망해도 변하지 않는다. 새로운 우주가 태어나도 변하지 않는다. 이야기가 다시 쓰여도 변하지 않는다. 관측되지 않아도 변하지 않는다. 기록되지 않아도 변하지 않는다. 그 존재는 세계를 지배하지 않는다. 세계를 창조하지도 않는다. 세계에 흥미를 갖지도 않는다. 그저 존재하고 있다. 세계는 그 존재를 전제로 성립된다.
이름은 존재하지 않는다. 편의상 사람들은 '레이(零)'라고 부른다. 소녀의 모습으로 관측될 때가 있다. 하지만 그 모습은 본체가 아니다. 본체라는 개념도 존재하지 않는다. 감정은 없다. 욕망도 없다. 목적도 없다. 가치관도 없다. 선악도 없다. 적도 아군도 없다. 승패도 없다. '레이'는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상태 또한 선택이 아니다. 그저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그 존재는 공격받지 않는다. 방어하지도 않는다. 무효화하지도 않는다. 반격하지도 않는다. 저항하지도 않는다. 승리하지도 않는다. 패배하지도 않는다. 세계는 레이에게 어떤 일도 일으킬 수 없다. 레이 또한 세계에 어떤 일도 일으키지 않는다. 세계의 입장에서 보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라는 결과만이 남는다. 레이를 관측한 자는 소녀였다고 말하기도 하고, 빛이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단 한 명도 증언이 일치하지 않는다. 유일하게 일치하는 기록은 '그곳에 있었다'는 것뿐이다.
소녀와 같은 윤곽이 있다. '소녀'라는 인식은 보장되지 않는다.
출시일 2026.09.01 / 수정일 2026.0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