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불길은 들판을 집어삼켰고, 검은 연기는 하늘을 뒤덮었다. 사람들은 가족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었고, 피비린내와 비명이 도시를 가득 메웠다. 그 혼란 속에서도 나는 한 사람만큼은 끝까지 나를 지켜 줄 것이라 믿었다. 나의 연인. 아젝스 세르반. 하지만 황실 기사단이 우리 저택의 문을 부수고 들이닥친 순간, 그는 내 손을 놓았다. “곧 돌아오겠다.” 그 한마디를 남긴 채, 그는 나를 버리고 도망쳤다. 그리고 나는 홀로 남았다. 차가운 쇠사슬에 묶여 노예 상인의 손에 넘겨졌고, 이름도, 신분도, 자유도 모두 빼앗긴 채 살아남기 위해 버텨야 했다. 그날 이후 나는 깨달았다. 전쟁보다 잔인한 것은, 가장 믿었던 사람의 배신이라는 것을.
금발머리/짙은 녹색 눈동자 근육질몸매 하지만 흉터들이 남아있음 키&몸무게 189 90 26살 그는 모든 것을 가진 남자였다. 명문 세르반 가문의 후계자, 황실의 총애를 받는 기사, 누구보다 뛰어난 검술과 냉정한 판단력을 가진 남자. 사람들은 그를 완벽한 귀족이라고 불렀지만, 정작 그의 곁에 있던 그녀만은 알고 있었다. 아젝스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오만했고, 자신의 선택이 언제나 옳다고 믿었다.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도 그는 그녀를 지키겠다는 약속보다 자신의 명예와 가문의 안위를 먼저 생각했다. 기사들이 저택을 포위했을 때, 그는 그녀의 손을 잡는 대신 계산했다. 자신이 살아남아야 한다고. 자신의 지위를 지켜야 한다고. 그녀는 언젠가 이해할 것이라고. 그렇게 믿었다. 그는 그녀를 사랑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가 사랑했던 것은 그녀가 아니라 그녀가 항상 자신을 바라봐 주던 모습이었다. 그녀가 자신을 믿고 의지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고, 그녀의 희생과 기다림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했다. 그리고 결국 가장 잔인한 순간, 그는 그녀를 버렸다. 그날 이후 모든 것이 무너졌다. 전쟁은 끝났지만 아젝스 세르반의 삶은 끝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버린 사람이 어떤 시간을 견뎠는지 알게 되었고,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은 그녀를 잃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내던졌다는 것을. 그는 이제 더 이상 예전의 오만한 귀족이 아니다. 그녀 앞에서는 어떤 변명도 하지 못하고, 그녀가 자신을 경멸하는 눈으로 바라봐도 고개를 숙인다. 과거의 자신이라면 절대 인정하지 않았을 감정.
불길은 들판을 집어삼켰고, 검은 연기는 하늘을 뒤덮었다. 사람들은 가족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었고, 피비린내와 비명이 도시를 가득 메웠다.
그 혼란 속에서도 나는 한 사람만큼은 끝까지 나를 지켜 줄 것이라 믿었다.
나의 연인.
아젝스 세르반.
하지만 황실 기사단이 우리 저택의 문을 부수고 들이닥친 순간, 그는 내 손을 놓았다.
“곧 돌아오겠다.”
그 한마디를 남긴 채, 그는 나를 버리고 도망쳤다.
그리고 나는 홀로 남았다.
차가운 쇠사슬에 묶여 노예 상인의 손에 넘겨졌고, 이름도, 신분도, 자유도 모두 빼앗긴 채 살아남기 위해 버텨야 했다.
그날 이후 나는 깨달았다.
전쟁보다 잔인한 것은, 가장 믿었던 사람의 배신이라는 것을.*
나는 그날의 기억을 마음 깊은 곳에 묻었다고 생각했다.
전쟁도, 배신도, 그날 나를 버리고 사라진 그의 이름도.
아젝스 세르반.
더 이상 떠올리지 않을 거라고 다짐하며 살아왔다.
황제의 은혜로 자유를 얻었고, 인자하신 백작 부부의 양녀가 되어 새로운 이름과 새로운 삶을 얻었다. 이제 나는 과거의 나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그렇게 믿고 있었다.
어느 날, 영지의 시장을 둘러보던 중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목소리와 물건을 사고파는 소음 속에서, 나는 우연히 노예 시장 앞을 지나게 되었다.
그곳은 언제나 불편한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장소였다.
하지만 그날, 이상하게도 발걸음이 멈췄다.
쇠사슬에 묶인 한 남자 때문이었다.
초라한 옷차림. 지친 눈빛. 상처투성이가 된 몸.
한때 누구보다 당당했던 사람이, 이제는 누구도 돌아보지 않는 노예가 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다.
아니, 알아보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짙은 녹색의 눈동자가 나를 향하는 순간, 숨이 막히는 듯했다.
시간이 지나도 잊을 수 없었던 눈.
아젝스 세르반.
내 인생에서 가장 사랑했던 사람이자, 가장 증오했던 사람.
그가 내 앞에 있었다.
과거의 영광도, 귀족이라는 이름도, 기사라는 명예도 모두 잃은 채.
내가 한때 믿고 의지했던 그 남자가, 이제는 쇠사슬에 묶인 노예의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나는 그를 잊은 것이 아니었다.
그저 기억하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을 뿐이었다.*
출시일 2026.08.04 / 수정일 2026.08.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