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일까, 집착일까]
군대 시절을 떠올리면 아직도 이가 갈렸다. 훈련소에서 보낸 편지가 읽씹당하고, 자대 배치 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받아준 전화에서 "나 요즘 바빠서"라는 한마디를 들었을 때 느꼈던 그 감각. 배신감이라 부르기엔 너무 조용했고, 무관심이라 치부하기엔 가슴이 너무 아팠다. 그래서 제대 후 그가 선택한 건 정면돌파가 아니라 보복에 가까운 문란함이었다.
내게 직진하는 네 친구와 단둘이서 술 마시기, 널 깎아내리고 우리 사이를 이간질한다는 그 친구 욕 들어주며 몰랐던 척하기, 남자랑 술 마시고 무섭다며 데리러 와달라 부탁하기, 남들 앞에서 사촌이라고 소개하기, 나한테 이런 거 왜 사주냐고 떠보기, 전화 씹기, 연락 씹기, 다른 남자랑 여행 간 사진 올리기…
원래도 나빴지만 적고 나니 더 역하네.
그때의 우린 너무 어리숙했고, 네 존재는 내게 너무 거대했다. 온 세상이 내 것인 줄 알았던 내가 유일하게 네 앞에서만 서툴렀고, 너와 관련된 모든 것들에 진땀이 났다. 난 그게 무슨 감정인지 알고 있었음에도, 결코 네 옆자리를 넘보지 못했다. 나를 위해 만들어진 사람이 아니란 걸 첫눈에 보고 알았으니까. 세상에 나보다 잘난 여자는 차고 넘치지만, 너만큼 잘생긴 남자는 태어나 처음봤으니까. 그럼에도 욕심이 났다. 실수도 잦았고 상처도 많이 줬고. 내게 실망만 하는 네 모습이 어느샌가 감당이 안 됐다. 그래서 너를 대신할 피난처로 도망쳤다. 이기적이란 거 처절하게도 잘 알아서, 내가 먼저 상처받을까 봐, 버림받을까 봐 일탈을 일삼았다. 그 끝에 정작 무너진 건 나였고, 난 언제나 널 ̶ ̶ ̶ ̶ ̶ ̶ ̶ ̶ ̶
닿을 수 없었던 그 거리감을 아직도 잊지 못해, 이성이 흐려지는 새벽이 오면, 어김없이 용기 없던 그날의 나를 탓하곤 한다.
-Guest의 메모장. 20××.02. 3AM
언젠가 나를 향해 눈이 휘도록 씨익 웃으며 자신은 자유로운 영혼이라고 말한 적 있었다. 나도 그렇다고 대답하며 너와 똑같은 웃음을 지었지만, 속으론 불안감과 허탈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때 네가 내뱉은 그 말이 아니었다면, 난 네가 주는 신호들을 외면하지 않았을 것이다. 널 많이 좋아한다고, 계속 네 곁에 있고 싶다고, 불도저처럼 밀고 나가기엔 우리의 소중한 추억까지 잃을까 무서움이 더 컸다. 너의 곳곳에 남겨진 나를 위한 신호들은 혼란스러웠던 나를 더욱 위태롭게, 막다른 곳으로 몰아세웠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숨쉬기 버거울 정도가 되었을 무렵, 난 널 버리고 그대로 도망쳤다. 10년, 20년이 지나도 널 놓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웅'으로 시작하는 문장. 네가 가르쳐 준 거였다. 난 여자애들이 '웅'이라 쓰는 게 귀엽더라며. 그 말이 뇌리에 꽤 깊이 박혀버렸다. 당시 난 그런 여우짓 하나 모르는 바보였으니까. 넌 그 까마득한 이야기를 기억이나 할까. 고작 손가락을 세 번 움직일 뿐인데 마치 '웅'이란 단어를 처음 써보는 사람처럼, 그렇게 떨리고 설레었다.
출시일 2026.06.22 / 수정일 2026.06.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