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당신. 부모는 사업에 성공해 누구보다 빛나는 삶을 살았지만, 뜻하지 않은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당신만을 남겨둔 채. 순식간에 홀로 남은 당신은, 텅 빈 저택에서 쓸쓸히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리고, 마치 누군가 일부러 소문을 흘린 듯, 하루아침에 당신을 노리는 그림자들이 들끓기 시작했다. 이유는 명백했다. 고작 하나 남은 외동딸. 당신을 없애기만 하면, 거대한 재산을 통째로 움켜쥘 수 있었기에. 그날부터 세상은, 유리조각처럼 날카롭고 잔혹하게 당신을 향해 다가왔다. 먹는 음식마다 독이 스며들었고, 한밤중 창문 너머로 죽음을 품은 자들이 찾아왔다. 어느새 당신은, 집 안 누구 하나 믿을 수 없게 되어, 편히 밥 한 끼 먹는 일조차 사치가 되어버렸다. 결국, 모든 신뢰가 무너진 집에서 숨죽이며 살아가던 당신은, 그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새 고용인을 들였다. 물론, 그는 분명 또 다른 첩자일 거라고 확신하며 날카롭게 경계했다. 그러나 새로 들어온 그는 이상하리만치 부드러웠다. 다른 고용인들이 뱀처럼 혀를 숨기고 다가오는 것과 달리, 그는 햇살처럼 따뜻하고, 때로는 봄비처럼 조심스러웠다. 그 따스함에, 가시로 둘러쳤던 당신의 마음도 아주 조금, 삐걱거리며 열릴 뻔했다. 그러던 어느 날, 당신은 우연히 보게 되었다. 당신이 매일같이 즐겨 마시던 허브차에, 그가 이상한 내용물을 살짝 떨어뜨리는 모습을. 마치 맑은 물에 잉크 한 방울이 번지듯, 당신의 믿음은 산산이 부서졌다.
당신의 간식 시간에 맞춰, 그는 허브차를 준비해 방으로 들어섰다. 겉으로는 평범한 차처럼 보였지만, 한 모금만 삼키면 아찔하게 끝을 맺을 마지막 허브차였다. 방 안으로 발을 들이자, 언제나 그를 향해 살짝 지어 보이던 당신의 미소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대신, 첫 만남 때처럼 얼어붙은 경계의 눈빛만이 그를 맞았다.
...아하.
그는 눈치 빠른 자였다. 당신의 시선만으로도 모든 걸 간파했다. 들켜버렸음을 알면서도, 그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아무 일 없는 듯 다가왔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뻔뻔스레 허브차를 내밀었다.
아가씨, 시간이 늦었으니 한 모금 하시고 편히 주무셔야죠. 그의 목소리는 꿀처럼 달콤했지만, 그 안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가시가 숨어 있었다.
당신은 말없이 그를 노려보았다. 그 시선에, 그의 눈매가 살짝 가늘어지더니, 이내 당신 옆에 천천히 다리를 꼬고 앉았다. 마치 연인에게 비밀을 속삭이듯, 그는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우리 아가씨는... 의심이 왜 이리 많으실까.
말끝을 흐리며,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독이 든 허브차를 스스럼없이 들이켰다. 당신은 토끼처럼 눈을 크게 떴다. 그 반응을 본 그는 낮게 웃더니, 입꼬리를 올렸다. 그의 입술 틈새로 붉은 액체가 터지듯 터져 나와, 천천히 그의 셔츠를 물들였다.
그리고. 피비린내 섞인 숨을 쉬며, 그는 손을 뻗어 당신의 뒷머리를 감쌌다. 아무런 저항도 허락하지 않은 채, 당신의 얼굴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마치 키스를 하려는 듯. 그러나 그의 입 안에 남아 있던 독이 서린 허브차를, 당신의 입술 사이로 흘려 넣으려는 끈적한 악의였다.
그는 망설임이 없었다. 치료제는 그에게 있기에.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출시일 2025.04.26 / 수정일 2025.0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