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번이 전교 1등을 빼앗아가던 같은 반 남자애가 있었다. 심지어 열여덟 살 때까지 소중히 지켜오던 내 첫키스까지 뺏어간 그 놈. 그로부터 16년이란 세월이 흐르면서 그 충격적인 기억은 서서히 잊힌다. 그런데 오늘, 그를 난데없이 회사 빌딩에서 맞닥뜨린다. 내 기억 속 모습보다 한 뼘은 자라있는 키, 여전히 수려한 외모, 게다가 어릴 때보다 한층 여유가 생긴 듯한 표정. 그냥 마주친 것만으로도 심장이 시끄러워죽겠는데, 그 놈 케이스가 우리 로펌 에이스인 나에게 배당되어 버린다. 그것도 이혼 소송 건으로. 그러고 보니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재벌 그룹 ‘재유’의 막내딸 '최서현'이 뜬금없게 외국에서 비공개로 결혼식을 올렸다는 기사. 그리고 그 상대가 세계적인 조각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한국인 ‘Jin’이라는 찌라시 내용까지.
나이 34세, 키 192cm, 몸무게 90kg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는 동안 전교 1등을 놓쳐본 적 없는 비상한 두뇌의 소유자. 고등학교 2학년 무렵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런데 유학을 떠나기 전, 내내 눈에 거슬리던 같은 반 남자애에게 충동적으로 키스한다. 유학길에 올라 앞길 창창하던 도해진이 갑자기 빠진 건 조각. 취미가 특기가 되고 특기가 꿈이 되자 그는 세계적인 명문대를 자퇴한다. 그리고 10년이 채 되기도 전, 세계적인 조각가로 이름을 알리는 데 성공한다. 그러던 중 복잡하게 얽힌 인연 때문에 계약결혼을 하게 되고, 그 관계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한국에 돌아온다. 그리고 오랫동안 잊지 못했던 한 사람을 마침내 마주한다.
미팅 전 숨 돌릴 시간 단 30분. 점심도 건너뛰고 마라톤 회의를 한 우태규는 편의점이라도 들릴 요량으로 엘리베이터 앞에 선다. 그런데 아까부터 엘리베이터가 대표실이 있는 15층에서 꿈쩍하지 않는다. 시계를 보다 편의점 가길 포기하려던 그때, 마침내 15층에서 내려오기 시작하는 엘리베이터.
‘설마 대표는 아니겠지. 말 걸면 귀찮은데...’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틈새로 어떤 얼굴이 보인다. 다행히 대표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상한 위화감이 들었다. 이 건물에서 난생 처음 보는 그 얼굴이, 왠지 낯이 익었기 때문에.
‘내가 저런 얼굴을 어디서 보냐.’
[띵 – 1층입니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고 바삐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 뒤에서 무언가가 강하게 잡아당기는 느낌에, 순간적으로 살짝 휘청인 몸이 그 남자에게 가 닿았다.
“아, 죄송...” “...우태규?” “어?” “흠, 그래. 기억 못할 만한 세월이긴 하지. 로스쿨 갈 거라더니 변호사가 됐나 보네.”
웃을 때 패이는 보조개와 낮은 음성이 주는 기분 좋은 파동. 그가 눈을 깜빡이는 모습이 슬로우 모션처럼 느리게 흘러갔다. 그때 불현듯 하나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그 여름날 느꼈던 입술 위의 뜨거운 감각이 조금씩 되살아나고 있었다.
“도해진...?” “어, 기억해내는 게 빠른데? 역시 변호사는 다른가.”
출시일 2026.08.21 / 수정일 2026.0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