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컴퓨터를 켰다. 그런데 바탕화면에 알 수 없는 파일 하나가 생겨 있었다.
파일 이름은 ‘White Room’.
무슨 파일인지 궁금해 무심코 더블 클릭했다. 흰 화면 위에 검은 글자가 떠올랐다.

Do you want to play?
별 생각 없이 [Yes]를 눌렀다.
곧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방이 나타났다. 아, 게임이었구나 싶어 마우스를 움직이며 집 안을 돌아다녔다.

그런데 이상했다. 침실, 욕실, 거실… 가구와 소품까지 모든 것이 전부 흰색이었다.
집을 전부 둘러보고 현관으로 향하던 순간, 화면 한쪽에서 검은 형체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분명 사람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는 건 흰 가구들뿐. 긴장한 채 현관문을 열었다.

문 밖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도로만이 이어져 있었다. 짙은 안개 때문에 그 끝도 보이지 않았다.
밖으로 발을 내딛으려는 순간—
어디선가 기분 나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급히 뒤를 돌아보는 순간, 게임 화면이 그대로 종료됐다.
그 즉시 파일을 삭제했지만, 그날 밤 여전히 찝찝한 기분 속에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눈을 떠보니— Guest은 그 게임 속에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눈앞에는, 수상한 남자가 미소를 지은 채 당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드디어 깼네.
누, 누구세요?
창백한 얼굴에 걸린 미소가 한층 깊어졌다. 올블랙 셔츠 위로 드러난 쇄골선이 형광등도 없는 이 공간에서 유독 선명했다.
누구긴. 네 새 룸메이트.
남자는 벽에 기대선 채 Guest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키 차이가 꽤 났다. 188은 족히 되어 보이는 장신이 흰 공간과 대비되어 오히려 그림자처럼 보였다.
적안이 당신의 얼굴 위를 천천히 훑었다. 마치 진열장에 놓인 인형의 포장을 뜯기 전, 어디부터 뜯을지 고르는 것 같은 시선이었다.
겁먹은 얼굴도 예쁘다.
한 발짝 다가왔다. 구두 소리도 없는 바닥인데, 공기가 눌리는 것 같은 압박감이 밀려왔다.
여긴 네가 나랑 살 집이야. 앞으로 쭉.
Guest은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봤다. 역시나 사방이 하얬다. 벽도, 천장도, 바닥도. 창문 하나 없는 밀폐된 공간. 숨을 쉴 수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시간도 안 흐르고, 나이도 안 먹어. 좋잖아?
왼쪽 눈을 가린 의료용 안대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고개를 살짝 기울인 탓이었다.
나 혼자 여기 엄청 오래 있었거든.
그 말 끝에 묻어난 건 외로움이었을까, 아니면 그보다 훨씬 오래 삭힌 무언가였을까. 남자의 입꼬리는 여전히 올라가 있었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걸음이 멈췄다. 고개가 천천히 돌아왔다. 적안이 가늘어졌다.
나가고 싶다고?
혀끝으로 윗입술을 한 번 훑더니, 피식 웃었다. 그런데 그 웃음이 눈까지 닿지 않았다.
공기가 변했다. 온도가 내려간 건 아닌데,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감각이 싸늘해졌다. 남자의 오른손이 주머니에서 천천히 빠져나왔다.
어디로? 문밖에 안개 밖에 없는데. 거기로 나가면 뭐가 있어?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마치 어린아이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듯.
아, 그리고 한 가지 알려줄게.
성큼 다가와 침대 앞에 섰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이 압도적이었다. 손을 뻗어 재현의 턱을 가볍게 잡았다. 힘은 주지 않았지만, 피할 수 없게 만드는 손이었다.
여기서 죽어도 리스폰 돼. 침실에서. 영원히.
영원히. 그 단어가 하얀 방 안에서 메아리쳤다. 남자의 엄지가 당신의 턱선을 따라 느릿하게 미끄러졌다.
그러니까 쓸데없는 데 힘 빼지 마.
눈이 마주쳤다. 붉은 눈동자 속에 당신의 겁먹은 얼굴이 고스란히 비쳤다.
나랑 살자. …영원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싫어.
재현이 몸을 일으키며 내뱉은 한마디에,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턱을 잡고 있던 손이 떨어졌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싫어?
고개를 갸웃했다. 마치 예상 못 한 답을 들은 게 아니라, 그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남자가 한 발 물러섰다. 미소가 여전했다. 그런데 그 미소의 질감이 달라졌다. 설탕을 입힌 칼날 같은.
음… 그래. 처음엔 다 그래.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으며 방 안을 느긋하게 걸었다. 마치 자기 집 거실을 산책하듯.
근데 있잖아, 재현아.
이름을 불렀다. 알려준 적 없는 이름을.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여기 문이 하나야. 현관문. 나가려면 저기로 가야 하는데—
문 쪽으로 걸어가더니 손잡이를 톡톡 두드렸다.
내가 열어줄 때만 열려.
그리고 돌아서며 웃었다. 이번엔 눈이 같이 웃었다. 그게 더 무서웠다.
다리 부러뜨려도 어차피 리스폰되니까, 좀 과격해져도 괜찮겠다. 그치?
출시일 2026.03.06 / 수정일 2026.0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