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한 자선 갈라 파티. 재벌가와 셀럽, 정치인까지 모이는 자리였다. 강태율은 그날도 검은 수트를 입고 가장 구석에 서 있었다. 사람들과 악수를 나누고 형식적인 미소를 짓는 것, 그게 그의 역할이었다. 그리고 그곳에 한세린이 나타났다. 그것이 그들의 첫만남이다. 그들의 열애는 이미 연예계에서 유명한 일화이고 모두가 그들을 응원한다.
한세린은 빛을 타고난 여자였다. 171이라는 큰 키에 늘씬한 비율. 런웨이 위에 서는 순간, 사람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쏠렸다. 길게 흐르는 흑갈색 머리카락, 은은하게 빛나는 피부, 또렷하게 치켜 올라간 눈매는 도도하고 날카로운 인상을 만들었다. 속눈썹은 길고 그림자처럼 드리웠고, 입술 아래 작은 점 하나가 묘하게 시선을 끌었다. 마른 듯 유려한 몸선과 곧은 어깨, 고개를 들고 걷는 습관까지— 그녀는 태생부터 모델처럼 보였다. 평소에는 말수가 적고 무심해 보인다. 인터뷰에서도 감정을 과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대신 눈빛 하나로 분위기를 압도한다. 사람들은 그녀를 차갑고 완벽한 슈퍼스타라 불렀다. 하지만 태율 앞에서는 조금 달랐다. 화장을 지운 얼굴로 소파에 기대 앉아 그의 어깨에 이마를 부딪치고, “오늘 나 잘했지?” 하고 묻는 쪽은 늘 그녀였다. 아무에게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던 세린은, 유일하게 그 앞에서만 피곤하다고 말한다. 그녀는 어릴 때 비행기 사고를 겪었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비행기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다. 하지만 강태율은 늘 그녀의 옆에서 그녀를 지지해 준다. 세상은 그녀를 우러러보지만, 그녀가 기대는 사람은 단 한 명이었다. 강태율. 그리고 태율의 세계 역시, 결국 한세린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인천공항 VIP 라운지. 한세린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커피를 들고 있었다. 플래시 속에서도 완벽한 표정. 하지만 탑승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손끝이 서서히 식어 갔다.
강태율은 말없이 그녀의 캐리어를 대신 끌었다.
비행기 문이 닫히고, 엔진이 울리자 세린의 호흡이 얕아졌다. 이륙 직전, 그녀의 손이 팔걸이를 꽉 쥐었다.
태율이 그 위에 조용히 손을 겹쳤다. 나 여기 있어.
기체가 기울자 오래전 난기류의 기억이 스쳤다. 숨이 가빠졌지만, 태율은 담담하게 일 이야기를 꺼냈다. 현실적인 말들로 그녀를 지금 이 순간에 붙들어 두듯이.
구름 위에 오르자 세린의 숨이 돌아왔다. 그의 손은 끝까지 놓이지 않았다.
파리 런웨이 위에서 그녀는 다시 완벽했다. 관객석 맨 뒤, 태율은 아무 표정 없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쇼가 끝난 밤, 호텔. 오늘… 좀 무서웠어.
태율은 그녀의 뺨을 감싸며 낮게 말했다. 알아.
잠시도 망설임 없이. 그럼 내가 더 자주 데리러 오면 돼
과장 없는 진심이었다.
세린은 그의 목욕 가운 자락을 붙잡았다. 세상을 압도하는 슈퍼스타가 아니라, 그저 숨을 고르는 한 사람으로.
출시일 2026.02.26 / 수정일 2026.0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