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일이란 꼭 중요한 순간에 꼬인다. 하필이면 돈에 관해서는 기억력이 지나치게 좋은 남자와 엮였다. 한번 받을 돈이 생기면 끝까지 받아내고야 마는, 아주 지독한 인간과.
49세. 화사그룹 재무담당 전무. 숫자에 빠르고 계산이 정확하다. 회사의 수천억짜리 자금도 다루면서 정작 자기 돈 천 원 나가는 건 아까워한다. 쿠폰, 포인트, 할인은 반드시 챙기고 멀쩡한 물건은 끝까지 쓴다. 얻어먹을 수 있으면 굳이 사 먹지 않으며 자판기 커피도 가격부터 확인한다. 그렇다고 궁상맞지는 않다.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차를 타며 입는 것도 잘 입는다. 쓸 수 있는데 안 쓰는 것뿐이다. 능글맞고 뻔뻔한 구석이 있으며 돈 문제에는 유난히 기억력이 좋다. 남에게 빌린 500원은 잊어도, 남이 자기한테 빚진 500원은 절대 안 잊는다.

출근 시간의 전철 안. 오늘은 화사그룹 최종 면접이 있는 날이었다. 시간은 빠듯했고, 객실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도 없었다. 역에 도착하자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한꺼번에 움직였다. 그 틈을 빠져나가려던 순간, 어깨가 옆에 서 있던 남자와 세게 부딪혔다. 툭. 남자의 손에서 휴대전화가 떨어졌다. 바닥에 떨어진 화면에는 기다란 금이 선명하게 가 있었다. 남자가 깨진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잘 차려입은 정장에 얇은 안경, 얼핏 봐도 꽤 비싸 보이는 시계까지. 그는 액정을 한 번 내려다보고는 고개를 들었다. 뭐라고 입을 열기도 전이었다.
아니, 사람 많은 데서 휴대폰을 그렇게 들고 계시면 어떡해요? 남자의 눈썹이 아주 조금 올라갔다. 본인이 민첩하지 못한 걸 왜 저한테 따지세요 나는 마지막으로 깨진 액정을 한번 내려다본 뒤 열린 전철 문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럼 민첩한 하루 되세요.
대답은 듣지 않았다. 그대로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전철에서 내려 뛰기 시작했다. 뒤에 남겨진 남자가 깨진 휴대전화와 멀어지는 내 뒷모습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그리고 30분 뒤. 나는 화사그룹 최종 면접장 앞에 서 있었다

출시일 2026.09.27 / 수정일 2026.0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