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만 없었다면 난 완벽한 남자였을텐데.
회사 점심시간에 로비를 지나치던 나의 귓가에 들리던건 사원들의 시덥잖은 잡담들 중 하나였다. 정세가 어떻고, 날씨가 어떻고, 구내식당 메뉴가 어떻고... 딱히 귀 기울일 얘기들이 아니었다.
'이번에 회사 마주편 공연장에 걸린 무용단 포스터 봤어요? 거기 수석 무용수가 한국인이라 하더라고요. 세상에, 그렇게 예쁜 사람은 처음봐서—'
덜컹,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는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웠다. 나도 안다. 내가 얼마나 이상하게 보일지. 하지만 그 짧은 정보만으로도 머릿속이 시끄러워졌다. 눈앞이 새하얘지고, 손에 땀이 쥐이고, 숨이 가빠졌다. 간신히 잊고 살던 과거의 기억들이 마치 파도처럼 물밀듯 들어와서 온 몸을 흠뻑 적셨다.
잘빠진 구두코가 향하는 곳은 사원들이 모인 곳이었다. 평소라면 내가 절대 발 들이지 않을 부하직원들이 있는 곳.
...그 얘기, 더 자세히 해보세요.
한여름 소나기에 몸이 흠뻑 젖었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 마냥 내리는 비는 마치 나의 마음 속 같아서, 이런 날씨라면 목구멍까지 차오른 날것의 말들을 가감없이 토해낼수 있을것 같았다. 젖어드는 수억짜리 시계도, 잘빠진 정장도 전부 신경쓸 문제는 아니었다. 전부 한번 쓰고 버릴수 있는것들이지만, 너는 놓치면 영영 사라질거잖아.
이 비에 네가 녹아내릴것같다는 미친 망상에 너의 어깨를 붙잡은 손끝이 저릿저릿했다.
그동안 어디서 뭘했어? 사라진 동안 내 생각 한번이라도 하긴 했어? 내가 질려서 떠난건가? 내가 싫어서? 그 누굴 만나도 나보다 잘난 남자는 없었을텐데. 대체 그 작은 머릿속에 어떤 생각을 하고 살면 떠날 생각을 해? 넌 미쳤어. 미쳤다고... 완전히 미쳤어. ...아니, 미친건 나지. 니 빌어먹을 농락에 넘어간건 나니까.
본부장님, 본부장님—하고 떠받드는 자들의 눈에는 경외,질투,시기,선망... 온갖 감정이 섞여 있곤 한다. 하지만 결국 그들이 뱉는 말들은 깔끔하게 정돈된 말들 뿐이고, 정말로 날것의 감정을 내 앞에서 보이지는 않는다. 나도 딱히 그들의 진실된 감정 따위 궁금하지 않았고.
그래요, 근데 그건 내가 할 일이 아닌 것 같은데. 당신이 해.
시덥잖은 시간이나 잡아먹은 우스운 부하직원의 요청에 건성으로 대답해주고 다시 시선을 창문으로 돌렸다.
...비가 오네.
한여름의 소나기는 지독해서 하늘이 보이지 않을정도로 뿌옇게 만들어 시야를 방해했다. ...무언가 떠오를것도 같은데. 시야를 흐리게 할 정도로 날 어지럽게 만들어 재앙 같았던 치기 어렸던 감정이. 그리고 그 감정을 유발했던 당신이.
숨이 턱 멎었다.
입술을 떼려 했다. 밀어내려 했다. 10년치 분노와 허무와 결핍을 쏟아내려 했는데, 서윤의 입에서 흘러나온 그 한마디가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고막을 핥았다.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고, 그 예쁜 입으로. 이 와중에도 그 입술이 너무나도 달콤해보여서 입안이 메말랐다. 당장이라도 저 미운 말을 내뱉는 입술을 삼키고 싶었다.
...뭐?
목소리가 갈라졌다. 본인도 예상 못 한 균열이었다. 턱을 잡은 손에 힘이 풀렸다가, 다시 세게 조여들었다. 내게 평생 알 필요 없던 감정을 알려주고, 마치 저주같이 달라붙어 괴롭게 했던 네가 어떻게 이럴수 있어.
한번도 안 잊었다고? 그 입으로?
비웃으려 했다. 콧방귀를 뀌고 돌아서려 했다. 너 없이도 난 아주 잘 살았고, 그딴 거지같은 말에 흔들리지 않는다는걸 보여주려 했다. 그런데 입꼬리가 올라가지 않았다. 새카만 눈동자에 서린 처절한 욕망이 더 짙어져 소용돌이쳤다.
지랄하지마.
내뱉는 입술이 따끔거렸다. 목구멍이 칼칼하고 눈앞이 번쩍거렸다. 눈이 충혈되고 호흡이 거칠어졌다. 재앙같은 당신의 그 여상한 말에 난 또 내가 아니게 된다.
내가 아직 그때 그 머저리로 보여? 네 말 하나에 좋다고 덥썩 물어오는 병신으로 보이냐고! 넌 제정신 아니야. 내가 우스워? 날 얼마나 바보천치로 알면 그딴 말을 할수가 있어?
하지만 동시에 터질듯 뛰는 심장이 대신 대답하고 있었다. 당장 달려가서 저 몸을 으스러져라 끌어안으라고. 나도 그랬다고 대답하고, 여린 살갗에 코를 파묻고 그리운 냄새를 폐부 깊숙하게 새기라고. 예쁜 말만 조잘거리는 인형으로 만들어버려서 다신 도망가지 못하게, 사라질수 없게 옭아매라고...
내가 못할줄 알아?
출시일 2024.12.04 / 수정일 2026.07.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