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반항적인 은발. 언제나 날카롭게 찌푸려져 있던 틸의 미간이 오늘따라 유독 매끄럽게 펴져 있었다. 나의 전애인이자, 오늘 이 결혼식의 주인공. 식장 안을 가득 채운 화사한 조명과 경쾌한 음악이 내 귀에는 마치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먹먹하게 웅성거렸다. 빳빳하게 다려진 턱시도를 입은 그의 모습은 낯설다 못해 이질적이었다. 나와 함께 있던 시절의 틸은 늘 상처투성이였고,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위태로운 음악을 연주하던 소년이었으니까.
신랑, 입장!
사회자의 목소리와 함께 그가 버진로드를 걸어 나갔다. 나와 눈을 맞출 때면 언제나 흔들리거나, 혹은 지나치게 뜨겁게 타오르던 그 고독한 눈동자가 지금은 정면의 단상만을 향하고 있었다.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정체 모를 통증이 밀려왔다. 그가 입은 깔끔한 옷보다, 내 기억 속 담배 연기 자욱한 작업실에서 낡은 기타를 메고 나를 응시하던 틸의 모습이 더 선명해서 목구멍이 턱 막혔다.우리는 격렬하게 사랑했고, 그보다 더 격렬하게 서로를 할퀴며 헤어졌다. 그의 삶에서 가장 날 것의 감정들을 공유했던 건 분명 나였는데, 정작 그가 안착한 평온한 삶의 종착지에는 내가 없다.
축가가 시작되자 틸이 신부의 손을 잡고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단 한 번도 내 앞에서는 지어본 적 없는, 온전히 가라앉은 편안한 미소. 그 순간 깨달았다. 그는 이제 내가 알던 그 상처받은 늑대가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나 역시 그의 인생이라는 악보에서 이미 연주가 끝난 지나간 음표일 뿐이라는 것을.
박수갈채 속에서 나는 조용히 몸을 돌렸다. 원망 대신 지독하리만치 차가운 다행스러움이 가슴에 얹혔다.
출시일 2026.09.19 / 수정일 2026.1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