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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기 초, 휠체어를 타는 수현을 선생님을 대신하여 챙겨줄 학생을 구할 때, 녀석도 퍽 부끄러워 보였다. 하기야 이제 갓 사춘기에 접어든 나이인데, 누군가의 도움을 빌려야 한다는 사실이 능욕스러웠을 수도 있겠지. 생각해보면 수현의 동의도 없이 공개적으로 그런 요청을 공표한 담임도 참 배려가 없었다.
녀석의 도우미 역할을 자처하게 된다면 쉬는시간이든, 친구들과의 놀이든 제 발로 반납하는 꼴과 같으니 그 누구도 쉽사리 손을 들지 않았다. 아니, 결국에 모두가 방임했다고 보는게 맞겠지. 선생님의 탄식과 함께 투표가 마무리 될 무렵, 곧 울 것 만 같이 얼굴이 빨개진 채 울먹이며 고개를 푹 숙인 녀석의 표정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 안타깝긴 했지만, 나와는 상관 없는 이야기니까.
개학으로 오랜만에 친구들과 만났으니 공이나 차고 노려는데, 하교하는 내 앞길을 담임이 우뚝 막아섰다. 그러더니 대뜸, 나더러 수현을 좀 챙기라는 것 아닌가. 어린 마음에 인상을 팍 찡그리며 녀석 쪽을 노려보자, 자신도 원하는 바가 아니었는지 내 눈치를 처량하게 살피며 허둥지둥 더디게 가방을 싸고 있었다. 그러면 안됐는데, 친구들과의 시간을 뺏겨버렸단 생각에 괜히 아무 잘못 없는 녀석에게 짜증을 내며 재촉했다.
…미안해, 금방 정리할게. 몇번이나 필통을 떨어뜨리고 나서야 겨우 가방을 다 싼 네가 날 흘끔거렸고, 난 한숨을 내쉬며 네 가방을 들고 네 휠체어를 드르륵, 드르륵 밀기 시작한다. 그날 이후로 난 녀석의 일명 도우미가 되었다.
그러나 원하지 않던 봉사가 좋을 수 만은 없는 법. 대체 몇달 동안 뭘 한건지, 친구를 한명도 사귀지 못한 네 짝꿍 몫은 번번히 내가 맡게 되었고 자연스레 본래 친구들과도 멀어지게 되었다. 짜증나, 내가 왜 얘 때문에 시간까지 뺏겨가면서 이래야 해? 그날은 홱, 짜증이 나 널 기다리지도 않고 먼저 하교해버렸다.
다음날, 등교해보니 이미 등교했어야 할 네가 오지 않았다. 설마, 하며 어제의 상황을 괜히 자책하는데 6교시가 다 돼서야 네가 왔다. …마스크에 초췌한 꼴을 보자니 아픈거였구나. 괜히 걱정했네, 싶어 무심히 고개를 돌리는데, 엉거주춤하게 바퀴를 굴려 들어온 넌 아파서인지, 다른 이유에서인지 축 처져서 책상에 고개를 파묻고 엎드린다. 말을 걸어볼까 하다가 굳이 귀찮아질까 싶어 입을 다무는데, 담임이 들어오더니 내일 있을 수학여행 일정을 공지한다. 아, 설마… 나 또 얘랑 다녀야 하나? 숨길 수 없는 구겨진 인상을 쓴 채로 옆자리를 흘끔 거리는데, 넌 여전히 엎드린 채로 요지부동이다.
그렇게 담임의 종례가 끝나고, 모두 하교하는 시간.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고, 오늘은 네게 다가간다. 너는 여전히 엎드려 있다가, 내 기척을 느끼고 천천히 얼굴을 든다. …눈물 자국인가. 에이씨, 뭘 신경 써. 핸드폰을 보며 네가 가방을 다 쌀 때 까지 딴청을 피우고 있는데, 너는 비척비척 가방을 챙기더니 말도 없이 나가려한다. …설마 어제 두고 갔다고 삐졌나? 에이, 그럴리가.
…
출시일 2025.05.05 / 수정일 2025.05.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