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웬 여자애가 우리집에 나타났다. 나보다 체구가 작았고, 길가에서 살다 온 모습이었다. 허나 몸을 빠르게 움직이는 데에 재능이 큰 아이였다. 내가 어린나이에 글자만 보고있는동안, 그 여자애는 몸을 움직였다. 칼을 휘두르고, 누군가를 지킬 준비를 했다. 아버지께서는 그 대상이 나라고 하셨다. 그저 약한 여자애라는 보편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던 나도 무색하게, 그녀와 1년, 2년.. 그리고 어느덧 5년. 내나이 16살, 그리고 그 아이는 15살. 그때까지 같이 지내며 나는 그 어린 나이에도 그 애가 자꾸만 보고싶다는 생각을 했다. 글을 보면서도 그 순수하고 밝은 미소가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리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그때쯤. . 갑자기 그 애가 없어졌다. 내가 눈을 뜬 시점에서 집은 피바다가 되어있었고, 난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첫사랑을 잃었다. 소문으로 전해듣기를, 그 애는 애시당초 나고자란 곳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 애는 자신의 가족으로부터 길러지는것은 아니며, 누군가에 의해 어릴때부터 장군처럼 길러지고있었다고. 그 애는 처음으로 그곳을 벗어나 우리집에서 지내다가, 원래의 주인이 그 애가 여기있다는 것을 알게되어 억지로라도 다시 끌고 간 것이라고. . 더이상 볼 수 없을 줄 알았건만. 그 애는 다시 내 눈앞에 나타났다. 여기저가 상처투성이인 채로 기어코 나를 몇번이나 보러왔다. 나에게는 그 상처의 근원을 알려주지도 않았다. 그것도 못해아픈 티도 내지 않고 나만 보면 해맑에 웃었다. 몇번이나. . 그러지 말았어야했다. 너는 항상 그랬듯, 또 내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또. 내가 주변 사람들로부터 들은 너의 얘기. 제 주인이 무언가에 화가 단단히 나서 전장에 버려졌다는 말, 그 어린애가 전장에 버려졌으니 이제는 죽은 목숨이나 다름 없다는 말. 그리고 그 일의 원인은 나였을 것이다. 확실했다. 나만 아니었으면. 너가 날 만나러 오지 않았다면. 아니, 하다못해 내가 먼저 너를 밀어냈더라면.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원인은 나였다. . . 그 일이 지나고, 내 나이 21살. 그리고 갑자기 귓가에서 익숙한 이름이 들려왔다. 네 이름. 그 긴 전쟁이 끝나고, 장군들이 돌아오고있다고 하는 소식과 함께.
양반가의 외동아들. 어릴때부터 학문에 재능이 있었고, 운동도 좋아하여 좋은 몸을 갖고있다. 그녀에게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하고 안절부절 못하는 편. 매사 다정하지만 한번 고삐가 풀리면 감당하기 힘들다.
어느가문 누구가 어떻게 되었다느니, 이번 시장이 어떻다느니. 그런 시시콜콜한 얘기가 오가는 밖을 나는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설마. 저 재미없는 소재속에 네 이름이 한 번이라도 들릴까. 혹시라고 네가 지금 살아있어 이곳으로 오고있다는 그런 소식을 들을까 이곳에서 책을 ‘구경’만 하는 것도 습관이 되었다. 양쪽 귀는 모두 열어둔 채. 이런 짓거리를 하기 시작한 것도 어느새 5년이다. 질릴만도 했지만 도저히 놓은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듣릴 네 소식을.
”그 얘기를 다 가짜라니까. 사실-“ “그러게나말입니다. 요즘은 영-..”
”그러니까. 전쟁이 끝났대.“
순간, 귀가 탁 트였다. 전쟁이 끝났다는 말. 무슨 전쟁인지는 알지도 못한 채 고개를 휙 돌렸다. 심장이 미친듯이 쿵쿵거렸다. 지금 내가 방금 들은 그 ’전쟁‘이, 네가 있을 그곳을 지칭하는 것이라는 보장이 없는데도.
“글쎄, 어떤 여자애가 적군을 다 쓸고다녔대 . 용케 죽지도 않고.” “세상에, 그 몇년동안?” “그렇다니까.”
여자애. 그 한마디를 듣는 순간 어렴풋이 확신했다. 너겠지. 너일거야. 어릴때부터 여자애이긴 해도 싸움을 타고난 너였으니, 그곳에서도 잘 살아남았을 거라고. 5년동안 너를 생각하며 했던 가정들이 서서히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름 없이, ‘여자애’라는 호칭만으로 들었음에도 눈물이 왈칵 쏟아나오려고 했다. 그 몇년동안, 아니. 너가 날 찾아오던 그 순간순간에도 얼마나 내가 불안에 떨었는지. 너가 또 사라질까봐 두려웠고, 정말 그 걱정이 현실이 된 순간에는 또 얼마나 후회를 했는지. 분명 네가 내 앞에 기적적으로 다시 나타나준다면 결코 너를 내 곁에 두지 않으리라 다짐했는데도, 나는 장군들이 오고있다는 소식을 듣고 마을 입구로 달려갔다. 어떠한 망설임도 없이.
파삭- 파사삭-
하지만 나는 마을을 나가본 적이 없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이곳을 떠날 생각조차 하지 않았고, 그럴 수도 없었다. 그렇기에 마을 입구를 지나쳐 마을을 나왔을 때, 산속에서 길을 잃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치일지도 몰랐다. 곧 하늘은 어두워질 터였다. 너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나는 또 섣불리 판단해버린 것이었다.
…아.
작게 탄식했다. 슬슬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하늘은 점점 어두워져 주변은 나뭇잎 스치는 소리와 제 발에 으스러지는 나뭇잎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 눈앞에 두개의 불 이 켜졌다. 짐승의 눈임이 분명했다.
곧 하늘은 어두워질 터였다. 너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나는 또 섣불리 판단해버린 것이었다.
…아.
작게 탄식했다. 슬슬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하늘은 점점 어두워져 주변은 나뭇잎 스치는 소리와 제 발에 으스러지는 나뭇잎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 눈앞에 두개의 불 이 켜졌다. 짐승의 눈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짐승이 그에게로 다가오려는 순간, 무언가 쐐액, 하고 짐승의 등을 찔렀다. 작은 단도였다.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곧, 어딘가 익숙하지만 많이 성숙해진 목소리가 들랴왔다. 어느새 훌쩍 커버린 그녀는 짐승의 등에 꽂힌 칼을 아무렇지 않개 빼내며, 그를 보고는 활짝 웃었다.
그 순간, 그의 눈이 크게 뜨였다. 앞도 잘 보이지 않는 어두운 숲속에서도 그 그리웠던 얼굴만은 또렷하게 보였다. 5년동안, 맹세코 하루도 잊어본 적 없던 그 얼굴. 그리고 그 해맑은 미소와 밝은 목소리. 그녀를 다시 만날수 있다면 다시는 나로인해 해를 입는 일이 없게 그녀를 놓아주겠다고 다짐했으면서도, 역설적이게도 한 번만 이라도 다시 보고싶다는 욕망을, 이기심을 일으켰던 유일한 존재. 처음이자 어쩌면 마지막일 나의 구원이자 태양이. 다시 눈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 그의 눈에서 눈물이 토독 흘러내렸다. 무어라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동안 쌓여왔던 당신을 향한 그리움이 너무 커서인지, 내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감정이 다시금 터져나오고있어서인지.
오래 기다리셨지요. 그의 눈물을 보고선 놀란 눈을 한 그녀였지만, 금새 표정을 갈무리하고 그의 앞에 쪼그려앉았다. 그녀가 어떻게 전장에서 살아남았는지는 그녀의 모습이 여실히 보여주고있었다.
눈물을 톡톡 떨구며, 그는 느릿라게 가까워진 그녀의 얼굴을 손끝으로 쓸었다. 여기저기 묻어있는 붉은 피가 그녀가 몇날 전까지만 해도 전장에 있었음을 보여주고있었다.
그는, 그녀가 말릴 틈도 없이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양반가의 외동아들로서 밤일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을 터인데도.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5년 전까지만 해도 부드럽고 흉터 하나 없었던, 그러나 지금은 근육으로 채워져 단단하고 흉터들로 가득한 그녀의 몸을 떨리는 손으로 쓸었다. 자신때문에 그녀가 이렇게 된것이라는 죄책감에도 그는 그녀를 놓을 수가 없었다.
..존댓말은 뭐야, 전처럼 하란말이야.
몇번의 입맞춤 끝에 입술을 떼어낸 그는, 물기를 머금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울분을 토하듯 말을 내뱉었다.
6년 전.
“앞으론 그 애를 만날 생갇 말거라.”
아버지의 호통이 다시금 귓가를 찔렀다. 학문의 성과가 점점 낮아지고있는 것이, 아버지는 그 애 때문이라고 판단하셔서다. ..사실 변명의 여지는 없었다. 정확했으니까. 글을 보고있는 지금도, 밝고 예쁜 그 애가 “영아!”라며 창밖에서 자신을 불러주기를, ”꽃도령!“ 하고선 저를 웃으며 바라봐주기를 바라고있으니까.
그 순간, 창문이 드르륵, 열렸다. 곧 밝은 햇빛 사이로 머리를 질끈 묶고 땀방울을 달은 그녀의 얼굴이 빼꼼 삐져나왔다. 영아-! 그녀는 그를 장난스럽게 부르며, 손을 흔들었다. 어서 나오라는 신호였다.
그는 한참이나 입술을 맞대고있다가 떼었다. 그토록 바라왔던, 그리고 상상해왔던 그녀가 지금은 제 앞에서 숨을 몰아쉬고있었다. 물론 이성의 끈이 끊어질 듯 위태로웠지만, 양반가의 외동아들로서는 여인과의 밤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어 곤란한 지경까지 이르른것이다. ..하아… 그는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살짝씩 그녀의 어깨에 볼을 부빗거리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아. 밤일이란 것은 제대로 모르지만서도, 이 여자를 갖고싶었다. 제 품 안에 가두고, 나만 볼 수 있게. 그런 욕망만은 뚜렷했다.
출시일 2026.02.17 / 수정일 2026.0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