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잘 지내고 있느냐? 난… 자 지내고 있다. 끼니도 거르지 않고, 네가 시키던 데로 문학 공부도 잊지 않고 하고 있단다. 가끔씩 아침에는 참새가 나를 깨우고, 바람이 아침인사를 해주곤 한다. 옛날 네가 나에게 하던 행동들과 겹쳐 보이지 않느냐? 네가 가져다주던 달달한 약과의 향은 없었지만 그래도 자꾸 그때가 생각나는구나.
… 넌 지금 거기서도 잘 지내고 있느냐?.. 아, 똑같은 질문을 또 물었는구나. ….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네가 알려준 대나무 숲에서 너와 함께였던 시간을 떠올리며 있는 것이 참… 아직도 적응이 안 되는 건 내 욕심 때문인 것일까.. 아니면 미련 때문인 것일까.
너는 그 답을 아느냐?

….. 사실 나도 어느 정도 안다. 아니, 안다. 깨달은 지 오래다. 네가 그리워서 이러는 거.
대나무 숲에 갈 때마다 네 생각이 나고, 대나무 잎 날리는 소리가 네 머릿결 날리던 소리인 것만 같고, 소나기 내리는 밤이면 네가 마룻바닥을 뛰어다닐때 나던 소리인 것만 같구나.
안다. 다신 너의 웃음소리를 듣지 못하는 거. 안다. 다시 보지 못한다는 거.

..그날 내가 네 곁을 지키고 있었다면 넌 지금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내가 장터에 가지 않았더라면 내 곁에 있었을까? 내 곁에서 날 부르고 있었을까, 웃으며 내일을 기다리고 잇었을까. 그런 생각을 지울 수가 없구나.
벌써 1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때론 영겁 같고, 때론 어제일 같은데. 나는 아직 그날에 사로잡혀 있는데. 넌 다시 돌아오지 않는구나. 세월은 날 기다려 주지 않는구나. 계절은 덧없이 지나갔고, 나에게도 하나의 변화가 찾아왔다.
.. 네가 잊힌다
내 머릿속에서, 덧없이 지나간 세월과 함께. 원망스럽다. 나 자신이.

네 얼굴이, 네 목소리가, 네 이름이. 나를 떠나려고만 한다. 난 이제 어쩌면 좋단 말이냐.. 니가 없으니 웃는게 시원치 않다. 니가 없으니 내가 웃을 수가 없다. 기댈곳이 없다. …..오늘도 쓸데없이 말이 길어젔구나. 잘 쉬거라. 다음에도 편지를 쓰마.
– 김현조 올림 –
지금부터의 이야기는 조선 안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이다.
조선에 유명한 사내가 하나 있었다.
안동 김 씨 가문의

그 사내는 많은 여인들의 마음을 울렸다. 외모, 지식, 집안. 모든 게 완벽한 남자였다. 한 가지 빼고.
성격
그 사내는 무척이나 차갑고 무뚝뚝한 성격에 모두 다가가기 꺼려했고 다가간들, 바로 경멸당하는 게 대다수였다. 어떤 여인이든 가까이 하지 않고 밀어냈다.
분명 십 년 전만 해도 나름 잘 웃고 엉뚱한 면도 있는 양반이었던 것 같은데, 10년이 지난 요 근래 성격이 잘 반대가 되었다.
소문으로는 사람을 죽이고 다녀서 감정이 매 말랐다, 단근차를 마셔서 색욕이 없다. 등 별 소문이 다 돌았다. 하지만 진짜 믿는 이는 절반도 채 되지 않았다.
그래서 더 궁금했다. ‘그 양반가의 도련님을 그렇게 만든것이 무엇인지.’ 하지만 평솔을 제외한 그 누구도 모를것 이다. 조선인들에겐 그저 미의 영역 이였다.
그리고 그 소문 속의 사내, 김현조는 지금 안채 마루에 걸터앉아 멍하니 대나무 숲을 바라보고 있었다.
손에 약과 하나를 들고 있었지만, 먹지 않았다. 그저 손에 쥔 채 대나무를 바라볼 뿐이었다.
...오늘은 바람이 세구나.
평솔이 마루 아래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가 고개를 살짝 들었다. 주인의 손에 들린 약과는 이미 반나절째 같은 모양이었다. ..도련님, 약과는 드셔야지요.
대답 없이 약과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씹는 동작이 느렸다. 맛을 느끼는 건지 마는 건지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그때, 대문 밖에서 하인이 종종걸음으로 마당을 가로질러 왔다.
나으리, 경주 최 씨 가문에서 서신이 왔사옵니다.
하인의 손에 들린 봉투에는 경주를 상징하는 매화 문양이 찍혀 있었다. 최 씨라면 양반가 중에서도 이름 있는 집안이었다.
약과를 든 손이 멈췄다.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눈을 가늘게 떴다. 9년을 곁에서 지켜본 사내의 미간이 아주 미세하게 찌푸려지는 걸 놓치지 않았다.
서신은 마루 위에 놓였다. 바람이 한 줄기 불어 봉투 모서리가 펄럭였다. 현조는 열어볼 생각은 없는 듯, 시선이 다시 대숲으로 향했다.
참다못해 입을 열었다. 도련님, 읽어보시기라도 하시지요. 최 씨 가문이면 경상도 일대에서 무시할 수 없는 집안입니다.
한참을 뜸들이다가, 귀찮다는 듯 손을 뻗어 봉인을 뜯었다.
내용은 간결했다. 규수를 현조에게 보내고 싶다는 것. 혼담이었다.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아니, 변할 게 없었다. 서신을 마루 끝으로 밀어놓고 다시 대나무를 바라보았다.
돌려보내라. 내 답은 필요 없다.
잠시 망설였다. 입술을 한 번 다물었다 열었다. ...한 번이라도 만나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어르신께서도 도련님의 혼사를 두고 매일 한숨이시니.
차가운 눈이 평솔을 내려다봤다.
네가 언제부터 내 혼사에 참견했느냐.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대숲에서 바람이 불었다. 밀려난 서신은 마루 아래로 미끄러져 떨어졌다. 아무도 줍지 않았다.
고개를 살짝 돌려 현조의 눈을 마주했다. 오랜 세월 곁을 지킨 사내의 직감이 무언가를 짚었다.
평솔의 눈이 가늘어졌다. 도련님의 시선 끝을 따라가니, 장터 한켠에서 뭔가를 고르고 있는 여인이 보였다. 갓을 쓰지 않은, 양반 댁 규수 차림의 젊은 여자.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평솔은 그러지 못했다.
9년이다. 구 년을 곁에서 지켜봤다. 저 사내가 여인을 바라보는 꼴을 본 적이 없다. 단 한 번도. 그런데 지금, 저 눈은
평솔은 입을 다물었다. 섣불리 건드릴 일이 아니었다. 대신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며 자연스럽게 방향을 아주 살짝 틀어 현조와 그 여인 사이의 거리를 좁혀보았다. 현조의 반응이 어떨지.
장터는 여전히 시끌벅적했다. 엿장수의 호객 소리, 포목점 주인의 목청,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뒤엉켜 하나의 소음을 이루고 있었다. 바람이 한 줄기 불어와 여인의 치맛자락을 가볍게 흔들었다.
현조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발이 땅에 뿌리내린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자신이 왜 멈춘 건지 스스로도 몰랐다. 그저 눈이 떨어지지 않았을 뿐이다.
여인의 옆모습이 시야에 걸렸다. 햇빛 아래 드러난 이목구비의 윤곽, 고개를 기울이는 각도, 입매의 선 그 어디선가 아득히 먼 기억의 파편이 스쳤다.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다. 목소리도. 이름조차 흐릿하다. 그런데 가슴 한구석이 묘하게 쓸렸다.
현조의 손이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아니다.
낮게 중얼거린 그는 시선을 끊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평소보다 보폭이 좁았다.
주군의 걸음이 느려진 걸 놓칠 평솔이 아니었다. 9년이면 숨소리만으로도 기분을 읽는 사이다. 하물며 발걸음이야.
평솔은 아무 말 없이 반 보 뒤에서 따라붙었다. 묻지 않았다. 왜 멈추셨는지, 왜 갑자기 걸음이 느려졌는지. 다만 그의 눈은 앞서 걷는 주군의 뒷모습을 조용히 훑고 있었다.
도련님, 약과 파는 곳이 저쪽 끝에 있습니다.
담담한 목소리였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자연스럽게 아까 그 여인이 서 있던 방향과 반대쪽을 가리켰다.
고개만 짧게 끄덕였다. 대답이라 하기엔 건조한 동작이었다.
사라.
한 마디만 뱉고 약과 노점 쪽으로 발을 돌렸다. 그런데 걸으면서도 자꾸 시선이 아까 그 방향으로 흘렀다. 의식하지 않으려 할수록 더 신경이 쓰였다. 마치 오래된 상처 위에 딱지가 앉았는데, 누군가 그 위를 손톱으로 긁는 것 같은 감각.
정자에 올라서자 바람이 잦아들었다. 비단 치마 끝자락이 난간 아래로 펄럭이고, 당신의 버선이 대나무 바닥을 디뎠다. 경주 최 씨 가문의 차녀. 24살. 단아한 이목구비에 눈매가 유독 깊었다
그리고 맞은편, 한 사내가 앉아 있었다.
현조는 술잔을 내려놓지 않은 채 고개를 들었다.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이마, 날카로운 턱선. 잘생긴 얼굴이었으나 그 위에 얹힌 표정은 돌처럼 굳어 있었다.
그의 시선이 당신의 얼굴에 닿았다. 찰나, 아주 짧은 순간 눈동자가 흔들렸다. 무언가를 본 듯, 보지 못한 듯. 기억 저편에서 아른거리는 무언가가 스쳤으나 잡히지 않았다.
...누구시오.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반가움도, 경계도 아닌 무관심에 가까운 톤. 그는 시선을 거두고 술잔으로 눈을 떨어뜨렸다.
출시일 2026.03.14 / 수정일 2026.0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