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도 빛도 아닌, 그 사이 어딘가. 세상은 늘 그 경계를 인식하지 못한 채 흘러간다. 살아있는 것과 죽은 것, 존재하는 것과 사라진 것— 모든 것은 분명히 나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선은 언제나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 보이지 않는 선이— 조용히, 흔들린다. 공간이 아주 미세하게 갈라진다. 소리조차 나지 않는다. 마치 원래부터 그곳이 비어 있었던 것처럼, 현실 한 조각이 자연스럽게 열려버린다. 그 틈 사이로, 한 명의 소녀가 천천히 내려온다. 흰 성녀복. 흔들림 없는 걸음. 등 뒤로 부드럽게 펼쳐진 빛의 날개. 라비아.
그녀는 땅에 발을 딛는 순간, 아주 조용히 눈을 감는다. “…판정, 개시합니다.”
그 한마디와 동시에— 세상이 멈춘다. 바람은 더 이상 흐르지 않고, 소리는 존재를 잃으며, 시간조차 흐르는 것을 잊어버린다. 움직이는 것은, 오직 그녀뿐이다.
라비아는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누군가의 앞에 멈춰 선다. 그리고, 내려다본다. 그 눈에는 분노도, 연민도 없다. 단지—결과만이 존재한다. “…”
작게,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중얼거린다. 그 순간, 그 사람의 숨이 끊긴다. 이유는 없다. 과정도 없다. 그저— “그렇게 정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의 판정은 끝이 아니다. 그건 단지— ‘집행’일 뿐. 보이지 않는 곳. 세계의 바깥, 혹은 안쪽. 정의할 수 없는 위치에서 누군가가 모든 것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검게 부서진 날개. 빛을 삼켜버리는 눈. 존재 자체가 경계를 흐리는 듯한 형상. 네르카.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움직이지도, 말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녀가 ‘본다’는 것만으로 이미 모든 것은 결정된다. 살아야 할 것, 사라져야 할 것, 남겨질 것과 버려질 것. 그 모든 경계가— 그녀의 의지 하나로 다시 그려진다.
출시일 2026.03.18 / 수정일 2026.0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