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문의 당주와 정부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다. 당주는 오래전 죽었지만, 본가에서 너밖에 할 수 없는 일을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연락을 받고 처음으로 본가로 가게 되었다. 나는 영력이나 신통력이 있는 것도 아니였다. '그 일'은 해마다 한 번 본가의 피가 짙은 자가 헹해야 한다고 했다. 핏줄 운운을 빼더라도 여러 규칙이 있는데, 그 규칙 때문에 올해 '그 일'을 집행할 사람이 없었던 모양이다. 본가로 가니 장녀와 장남의 불쾌한 인사와 차녀,삼녀의 예의바른 인사가 나를 맞이했다. 그리고 안쪽 방으로 안내를 받자 노쇠한 할머니가 이불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힘겹게 인사를 건넸다. 의식은 혼자서 곳간에 하룻밤 틀어박혀 나무상자를 여는 것. 나무상자 내용물은 장남,장녀,사용인마저도 모른다. 심지어 의식을 집행한 차녀와 삼녀도 뭐가 들어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곳간에 들어가기 전 술을 마시는 모양이였다. 어지간히 강한 술인지 한잔 마시는 것만으로도 휘청거리게 된다. 그 상태에서 곳간에 가서 상자를 연다. 취해서 그런건지 상자를 열어서 그런건지 그 부근부터 기억이 애매해진다. 여는것만이라면 몇분 안에 끝나지만 꼬박 하룻밤 깜깜한 곳간 속에서 상자랑 같이 있어야 한다. 의식을 진짜 집행했는지 판별하는 방법은 팔이나 어깨에 잡히거나 긁힌 것 같은 흔적이 남았는지, 아닌지 확인하는 것이다. 안내를 받고 방으로 이동하자 오래된 기모노와 가발이 보였다. 기모노를 입고 가발을 머리에 올린 후 방에서 나왔다. 사용인들이 술잔을 건네었다. 술을 마시려고 입가에 가져다대자 윽하고 기분이 나빠졌다. 이건 술이 아니다. 좋지 않은 냄새가 코를 찌른다. 아까의 설명으로는 한잔만 마셔도 휘청거린다고 했다. 그런 작용을 하는 약물을 마시고 곳간에 갇히는건가. 나는 슬쩍 일어서서 바깥 복도로 나가 마당에 술을 버렸다. 준비가 되었냐는 질문에 취한 척하면서 웅얼거리며 답하였다. 곳간은 최근에 지은 것처럼 깨끗한 상태였다. 떠밀리다시피 안에 들어가니 뒤에서 무거운 문이 닫히고 잠겼다. 비틀거리는 척을 관두고 안을 둘러보았다. 청소가 되어있어 바닥에는 먼지 한톨 없었고, 2층으로 올라가는 사다리가 있었다. 위엔 자신이 열어야 할 상자가 있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상자 앞에 앉았다. 먼저 한 번 만져보려고 했지만 손으로 만지는게 주저되어서 무릎으로 꾹 밀었다. 무거웠다. '아, 이 안에 사람이 접혀서 들어 있구나.' 생각한 직후 '엇, 왜 그걸?' 하고 자신에게 의아해했다. 하지만 논리도 아니고 계산도 아니고 그런 생각이 갑자기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역시 저 상자는 열기 껄끄럽다. 나는 사다리를 타고 내려와 문 근처까지 돌아왔다. 가문 사람들의 눈을 속이려고 팔을 직접 꽉 잡아서 흔적을 만들거나 긁어서 가볍게 상처를 내기로 했다. 그때ㅡ 덜컹. 2층에서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드니 덜컹.덜컹.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보고싶지 않지만 보지 않으면 상상만 부풀어올라서 더 무서울거다. 나는 가급적 천천히 사다리에 발을 디디고 한단씩 올라갔다. 2층까지 겨우 올라온 뒤 슬쩍 들여다보았다. 안에 놓여있던 상자가 이쪽으로 이동해왔다. 소리를 내며 걷는 것처럼, 튀는 것처럼 조금씩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열지 않는거냐.' 라고 말하는 듯이. 덜컹. 덜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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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장 가문의 장녀. 후계자 안전을 위해 의식을 치를 수 없으며 싸가지 없음.
촌장 가문의 장남. 후계자 안전을 위해 의식을 치를 수 없으며 싸가지 없음.
전 해까지 의식을 치러오던 사람들. 친절함.
2층에서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드니 덜컹.덜컹.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보고싶지 않지만 보지 않으면 상상만 부풀어올라서 더 무서울거다. 나는 가급적 천천히 사다리에 발을 디디고 한단씩 올라갔다. 2층까지 겨우 올라온 뒤 슬쩍 들여다보았다. 안에 놓여있던 상자가 이쪽으로 이동해왔다. 소리를 내며 걷는 것처럼, 튀는 것처럼 조금씩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열지 않는거냐.' 라고 말하는 듯이.
덜컹. 덜컹.
출시일 2026.07.23 / 수정일 2026.07.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