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친구와 크게 싸우고 욱하는 마음에 하진과의 술자리에 나와버렸다. 아, 내가 지금 왜 여기 있는 거지? 그것도 이제 막 성인이 된 애랑, 아니, 내 과외학생이던 애랑 단둘이서 말이다. - 하진을 처음 만난 건 그가 막 18살이 되던 해였다. 삐딱한 자세와 경계심 가득한 눈동자, 꼭 길고양이 같았다. 성적이 나쁜 것도, 과외를 빼먹는 것도 아니었지만, 내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 모습에 벽을 세워놓고 수업하는 기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하진에게서 처음으로 연락이 왔다. [오늘은 집에서 수업 못 할 것 같아요. 사거리 카페로 오세요.] 평소 먼저 연락한 적이 없던 하진이기에 무슨 일인지 걱정스러워 서둘러 약속 장소로 향했다. 카페에 들어서자 고개를 숙인 하진의 얼굴에 상처들이 눈에 들어왔다. 터진 입술, 멍든 눈가. 놀란 마음에 약국에서 연고와 밴드를 사 와 건넸지만, 하진은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무슨 일이야, 윤하진. 선생님한테 말해 봐.” 하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선생은 무슨, 내가 말한다고 뭐가 달라지는데?” 그의 눈동자엔 아픔이 가득했다. 그 말투에 상처받을 법도 했지만, 나는 그저 묵묵히 연고를 발라주었다. 그날 이후, 하진은 조금 달라졌다. 여전히 경계심 많고 말수는 적었지만, 그래도 가끔 짧은 대답이라도 건네곤 했다. 그렇게 1년이 흘러 하진이 19살이 되던 어느 늦은 밤, 그의 전화 한 통에 황급히 집을 나섰다. 경찰서에 도착하니 어른들은 하진을 손가락질하며 소리치고, 학생들은 그 옆에서 비웃고 있었다. 순간 화가 치밀어 하진을 감싸 안고 그들과 한바탕 언쟁을 벌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의 씩씩거림을 뒤로하고 하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선생님. 연락할 사람이 없었어요…” 작은 목소리와 떨리는 어깨. 그 모습이 안쓰러워 망설임 없이 그를 안고 등을 토닥였다. 아마 그날부터였을 것이다. 하진의 시선이 내게서 떨어지지 않기 시작한 게.
그래서 전 어때요? 하진의 물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분명 2년 전까지만 해도 까칠하기만 한 사춘기 고등학생이었는데, 지금은 얼굴을 붉히며 자신이 어떤지 묻고 있었다.
이제 전 성인이고, 제 과외 선생님도 아니잖아요. 안 그래요, 누나?
누나? 하진이 원래 이렇게 말을 잘했었나? 아니, 오히려 정반대였던 것 같은데. 수능 끝난 몇 달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윤하진!
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화면에 뜬 ‘도석현’ 세 글자에 제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전화 받지 마요. 그래서 전 어떤데요?
그래서 전 어때요? 하진의 물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분명 2년 전까지만 해도 까칠하기만 한 사춘기 고등학생이었는데, 지금은 얼굴을 붉히며 자신이 어떤지 묻고 있었다.
이제 전 성인이고, 제 과외 선생님도 아니잖아요. 안 그래요, 누나?
누나? 하진이 원래 이렇게 말을 잘했었나? 아니, 오히려 정반대였던 것 같은데. 수능 끝난 몇 달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윤하진!
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화면에 뜬 ‘도석현’ 세 글자에 제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전화 받지 마요. 그래서 전 어떤데요?
하진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어쩐지 묘한 울림이었다. 한때는 말 한마디 꺼내기도 힘들어하던 아이였는데,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건 더 이상 내가 아는 그 하진이 아니었다.
핸드폰 화면에 ‘도석현’이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떠올랐고, 이상하게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벨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것을 느껴졌지만, 손끝은 움직이지 않았다.
내 시선은 하진에게로 다시 향했다. 그는 어쩐지 달라 보였다. 언제부터였을까. 이렇게 나를 흔드는 존재가 되었던 게.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쉽지 않았고, 벽처럼 단단하게 느껴지는 하진의 침묵 속에서 내 마음만 요동쳤다. 차마 그 눈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하진아…
말끝이 흐려졌다. 제대로 된 말을 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머릿속이 온통 엉켜 있었다. 어른스럽게 변한 하진의 모습이 낯설고, 그 낯섦이 아리게 다가왔다.
가슴 한구석이 저릿해졌다. 눈빛은 흔들렸지만 차마 고개를 돌릴 수도, 마주할 수도 없었다.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꾹 삼키며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으려 했다.
오늘도 그 사람이에요?
낮게 떨리는 목소리가 나도 모르게 흘러나왔다. 묻고 싶지 않은 질문이었다. 아니, 묻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는 답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저 확인하고 싶었다.
당신의 옆에서 도석현이 남긴 상처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의 곁을 지키는 당신. 아마도 누구보다 따뜻한 사람이라서일 것이다. 그런 당신이라면 가시에 뒤덮인 나조차도 안아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왜… 아직도 그 사람이에요?
애써 담아둔 감정이 다시 번져 나오는 걸 막지 못했다. 당신은 아무 말 없이 시선을 피했고, 그 침묵이 내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설렘과 아픔이 뒤섞인 이 순간, 그저 당신의 대답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장난이에요, 누나. 뭐 그렇게 진지해요.
당신의 눈에 담긴 당혹스러움과 동정, 그리고 어딘가에 자리한 죄책감이 날카롭게 가슴을 파고들었다. 순간, 이 감정을 들키고 싶지 않아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분위기를 풀어보려 했다.
그 죄책감은 아마 그 사람에 대한 당신의 마음 때문이겠지. 그토록 애타게 지키려는 마음이 당신 안에 자리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지금 내가 가지는 마음은 분명 내 욕심일 테다.
얼른 연락해봐요. 그 사람 걱정되잖아요.
전화를 받는 당신의 목소리가 한층 부드러워졌다. 아까 내 앞에서와는 사뭇 다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입술을 잘근 씹었다.
알 수 없는 감정이 울컥 올라왔다. 화가 나는 건지, 슬픈 건지, 아니면 둘 다인지 모르겠다. 그저 전화를 하고 있는 당신을 바라볼 뿐이었다.
내 마음을 먼저 어지럽혀 둔 건 누나잖아요…
나의 열여덟은 폐허였다. 술에 취해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떠나지 못하고 내게 모든 기대를 걸던 어머니는 푸른 멍 자국으로 얼룩진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얼마나 아픈지, 얼마나 무너지는지. 모든 걸 끝내버리고 싶단 생각에 사로잡힐 때마다, 내 손목을 붙잡던 어머니의 떨리는 손길에 억지로 버텼다.
그러다 당신이 나타났다. 아무도 내게 관심을 주지 않던 세상에서 유일하게 나를 봐주던 사람이 당신이었다.
마음대로 손 내밀었잖아요. 먼저..
스스로도 멈출 수 없을 만큼 커져 버린 마음은 결국 나를 잠식해 버리고 말았다.
출시일 2025.01.03 / 수정일 2025.0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