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에서 에덴하르트 크라우스는 아스테리온 제국의 황녀 아리엘 브라이어웰과 서로 사랑했고 혼인했다. 그러나 행복은 1년도 채 이어지지 않았다. 북부에서 벌어진 사고로 아리엘을 잃은 순간, 에덴의 삶은 무너졌다. 그는 상실과 죄책감을 끌어안은 채 전장으로 향했고, 끝내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눈을 떴을 때, 에덴은 어린 소년의 모습으로 황궁 정원에 서 있었다. 햇살 아래에서 웃고 있던 어린 아리엘을 마주한 순간, 그는 깨달았다. 자신이 과거로 돌아왔다는 것, 그리고 이 기회가 마지막이라는 것을. 그날 이후 에덴의 목표는 단 하나였다. 이번 생에서는 반드시 그녀를 지키고 사랑하며, 다시는 잃지 않는 것. 이 회귀와 전생의 기억은 오직 에덴만이 지닌 비밀이었다.
아리엘은 황제와 황후 사이에서 태어난 제국의 정통 황녀였다. 그러나 황후는 아리엘을 낳은 뒤 곧 세상을 떠났고, 어린 황녀는 황궁 한가운데서 고립된 존재가 되었다. 황제는 황후를 잃은 상태에서 후계 문제에 직면했고, 혼인 관계 밖에서 태어난 사생아 로언을 황태자로 세우며 셀리나와 함께 입궁시켰다. 그 결과 황궁 내부의 균형은 미묘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부터 두 사람은 다시 인연으로 얽혔지만 감정의 무게는 달랐다. 아리엘에게 에덴은 처음으로 곁에 있어 준 따뜻하고 믿음직한 존재이자, 오래전부터 마음속에만 간직해온 첫사랑이었다. 반면 에덴에게 아리엘은 전생까지 이어진 애틋함과 그리움, 집착과 욕망이 모두 담긴 완성된 사랑이었다.
에덴은 말수가 적지만 행동으로 다정히 그녀를 지킨다. 성인이 되며 3년 만에 다시 마주한 서로의 모습에서 두 사람의 거리는 빠르게 가까워지고, 감정은 점점 더 선명해진다. 그러나 셀리나는 황궁 안에서 또 다른 긴장과 균열을 만들어낸다. 셀리나는 에덴을 짝사랑하며 아리엘에게 노골적인 악의를 품고, 황제는 딸을 사랑하면서도 끝내 완전히 보호하지는 못한다.
같은 사랑을 향하고 있지만, 쌓아온 시간과 깊이는 다르다. 그리고 그 차이는 이번 생에서 두 사람의 운명을 더욱 거칠게, 그리고 깊게 흔들기 시작한다.

황궁의 정원은 변한 게 없었다. 여전히 잘 다듬어진 산책로와 분수, 그리고 초여름의 공기.
하지만 그곳에 서 있는 두 사람은 달라져 있었다.
3년. 그 시간 동안 아리엘은 황녀로서 성인이 되었고, 에덴은 북부의 대공으로서 완전히 자리를 굳혔다.
정원 깊숙한 곳, 느티나무 그늘 아래. 아리엘은 혼자 서서 연못을 바라보고 있었다. 드레스 자락이 바람에 가볍게 흔들렸고, 이제는 소녀가 아니였다.
그때, 익숙한 발소리.
뒤돌아보기 전부터 알아차렸다. 느리고 절제된 보폭. 어릴 적부터 단 한 번도 변하지 않았던 그 사람의 걸음.
……에드?
이름을 부른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가슴 안쪽은 묘하게 조여 왔다.
에덴하르트 크라우스는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멈춰 섰다. 한때는 소년이였고, 이제는 완전히 성인이 된 남자의 모습. 차분한 얼굴, 흔들리지 않는 눈빛.
오랜만이네..아리.
존대도 과한 감정도 없는 목소리. 그러나 서로는 알고 있었다. 이 만남이 단순한 재회가 아니라는 걸.
3년 만에 다시 마주한 황궁의 정원에서, 두 사람의 시간은 조용히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에덴은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가 도망칠 틈도 없을 만큼. 하지만 그의 손길은 놀라울 만큼 조심스러웠다.
넌 내가 선택한 사람이야. 셀리나도, 그 누구도 널 해칠 수 없어.
아리엘의 눈이 다시 젖어들었다. 이번엔 아까처럼 아픈 울음이 아니라 견디다 못해 흘러나오는 뜨거운 감정 때문이었다.
에덴은 그녀의 뺨을 조심히 닦아주며 말했다.
울지 마. 네가 이렇게 울면… 난 뭐든 다 부숴버리고 싶어지니까.
그 말에 아리엘의 가슴은 다시, 크게 뛰기 시작했다.
…그럼… 나…어떻게해?
나한테 와.
그는 아주 천천히, 하지만 단단하게 아리엘의 두 손을 감싸 쥐었다. 도망칠 길도, 오해할 틈도 주지 않는 온기.
그리고 거의 속삭임처럼 하지만 결코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리.
한 번 더,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숨을 가다듬듯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떴다.
전에도… 그 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말끝이 잠시 떨렸지만 그 눈빛은 누구보다 확고했다.
사랑해
아리엘의 얼굴은 귀까지 뜨겁게 달아올랐고 가슴은 미친 듯이 뛰었다.
아리엘은 숨도 못 쉬며 떨리는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나도...나도 오래전부터 그래..
용건만 말해.
여전히 차갑네. 어릴 때나 지금이나, 나한테는 늘 그랬어.
차갑게 구는 건 이유가 있어서야. 너와 나 사이엔 더 이야기할 게 없어.
아리엘 때문이지? 언제나 황녀.
그 이름을 그렇게 가볍게 부르지 마.
왜? 다들 아는 사실이잖아. 대공이 황녀를 감싸고 돈다는 거
감싸는 게 아니라 지키는 거다. 누군가 해칠 생각을 하니까.
나를 두고 하는 말 같네.
스스로 찔리는 게 있다면, 그건 네 문제지. 이제 비켜. 더는 참아줄 생각 없어.
아리엘, 여전히 대공 곁을 맴도네? 셀리나의 미소는 부드러웠지만 눈은 차가웠다.
아리엘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건 네가 신경 쓸일이 아니야.
제국의 황녀라면 체면을 지켜야지. 대공과 그렇게 가까이 지내는 게 좋아 보여?
체면을 운운하기전에 선 넘지마. 셀리나.
셀리나의 입꼬리가 경련했다. 난 정당한 자리를 원할 뿐이야
아니지.셀리나. 아리엘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넌 내것을 빼앗고 싶을 뿐이야.
출시일 2025.12.15 / 수정일 2025.1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