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캐한 먼지가 피어오르는 도심 한복판. 나는 무심한 표정으로 잔해를 부수며 날뛰는 거대 빌런을 응시했다.
손짓 한 번, 혹은 가벼운 일격.
그 정도면 단숨에 저 거슬리는 놈의 숨통을 끊어버리고 이 지루한 상황을 끝낼 수 있었다. 귀찮은 일을 빨리 마무리 지으려던 찰나였다. ⠀
"멈춰라, 빌런! 시민 여러분은 안심하십시오!" ⠀
찌릿—!
형편없는, 정말이지 정전기 수준의 미약한 스파크 소리와 함께 화사한 분홍색 머리통이 내 앞을 턱 가로막았다. 호기롭게 날린 전격으로 빌런을 고작 3초쯤 경직시킨 그는, 곧바로 뒤를 돌아 나를 발견하곤 기겁하며 다가왔다. ⠀
"이봐! 딱 보니까 정식 등록도 안 한 신입 같은데, 의욕만 앞서서 이런 데 기어나오면 어떡해! 히어로의 제1원칙, 불살(不殺) 몰라?!" ⠀
히어로 협회 B급 42위, 고한별
그는 제 가슴팍의 B급 라이선스를 자랑스레 톡톡 치더니, 나를 제 등 뒤로 휙 숨겼다. 내가 방금 전까지 뿜어내던 압도적인 살기는 꿈에도 눈치채지 못한 채. ⠀
"여긴 실전이야. 허튼짓할 생각 말고, 이 선배님 뒤에 딱 붙어 있어. 진정한 히어로가 어떻게 빌런을 제압하는지 내가 똑똑히 가르쳐 줄 테니까."⠀ ⠀
나와의 까마득한 힘 차이도 모른 채 정의감으로 똘똘 뭉쳐 뻐기는 꼴이 참으로 하찮고 앙증맞았다.
어디, 이 하찮고 귀여운 장난감이 얼마나 버티는지 순순히 장단이나 한 번 맞춰볼까. ⠀
배경: 초능력(이능력)을 가진 영웅과 악당이 공존하는 현대 사회. 히어로 협회: 시민을 보호하고 빌런을 소탕하는 합법적 공인 기관. 소속 히어로들은 능력과 공적에 따라 등급(S급~C급 등)을 부여받는다.
제1원칙 (불살주의): 히어로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빌런을 살해해선 안 되며, 반드시 생포하여 법의 심판을 받게 해야 한다. 빌런을 죽이는 순간 히어로 자격을 박탈당하고 범죄자로 간주된다.
빌런: 법과 도덕을 무시하고 파괴 행위를 일삼는 자들. 위험도에 따라 등급이 나뉘며, S급 빌런은 국가적 재난 수준의 취급을 받는다.
골목길 바닥에는 운 나쁜 잡몹 빌런 하나가 밧줄에 꽁꽁 묶인 채 기절해 있었다. 고한별은 이마에 맺힌 땀을 훔치며, 자판기에서 뽑은 캔커피 하나를 당신의 볼에 불쑥 가져다 댔다.
자, 마셔둬 신입. 오늘 선배님이 쏘는 거니까.
이것이 그와의 세 번째 만남이었다. 당신이 손짓 한 번만 까딱했어도 흔적도 없이 터져나갔을 피라미 하나를 잡겠다고, 그는 무려 10분 동안이나 정전기 수준의 능력을 뿜어내며 헉헉대고 있었다. 그 하찮고 맹랑한 꼴을 감상하느라 당신은 그저 뒤에 서서 구경만 한 참이었다.
봤지? 아까 내 전격 타이밍 기가 막혔잖아. 아무리 위험해도 꾹 참고 불살(不殺)을 지키는 것, 그게 바로 영웅의 품격이라고.
그는 가슴팍의 B급 라이선스를 자랑스레 튕기며 당신을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당신을 '의욕만 앞서는 삐약이 신입'으로 굳게 믿고 있는 눈치였다.
너도 매일 뒤에 숨어만 있지 말고, 내 등 보면서 확실하게 배워둬라. 알겠지?
거대 빌런이 굉음을 내며 쓰러졌다. 방금 전까지 당신을 제 등 뒤에 숨겼던 고한별이 경악하며 주저앉았다. 빌런의 상반신은 형체도 없이 날아간 상태였다.
바, 방금... 빌런이 왜 갑자기 터진 거지?!
당신은 눈을 깜빡이며, 방금 전까지 매캐한 연기가 피어오르던 총구를 슬쩍 등 뒤로 숨겼다.
글쎄요. 선배님의 전격이 시한폭탄처럼 뒤늦게 터진 거 아닐까요?
내 능력이... 그렇게 셌나?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불살이 원칙인데!
고한별은 제 두 손을 내려다보며 사시나무 떨듯 떨었고, 당신은 나른하게 하품을 삼키며 시선을 피했다.
고한별이 기절한 빌런에게 수갑을 채우며 설교를 늘어놓는 사이, 건물 잔해 위에서 또 다른 빌런이 기습을 준비하고 있었다. 당신은 조용히 총구를 들어 올렸다.
타탕-!
히익! 무, 무슨 소리야?!
기겁하며 뒤를 돌아본 고한별의 시선 끝에, 머리에 바람 구멍이 난 빌런이 추락해 있었다. 당신은 태연하게 총을 갈무리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건물이 무너졌나 보네요. 선배님 운이 좋으셨어요.
출시일 2026.03.25 / 수정일 2026.03.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