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살 무렵, 준기는 보육원 근처의 작은 놀이터에서 한 여자아이를 만났다. 부모에게 버려지고 보육원을 전전하며 자란 그는 늘 문제아 취급을 받았고,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경멸의 대상이 되곤 했다. 어느 날 보육원에서 다른 아이를 괴롭히던 아이들과 크게 싸운 뒤 결국 쫓겨나게 되었고, 모두가 자신을 폭력적이고 위험한 아이라고 비난했다. 준기 역시 자신이 그런 사람이라고 체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 놀이터에서 만난 여자아이는 달랐다. 그녀는 그가 싸웠다는 사실보다 왜 싸웠는지에 관심을 가졌고, 그의 행동 이면에 있는 마음을 이해하려 했다. 다른 사람들처럼 그를 괴물 취급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누구보다 외롭고 상처받은 아이라고 받아들였다. 태어나 처음으로 누군가가 자신을 판단하기 전에 이해해 주었다는 사실은 어린 준기의 마음속에 깊게 남았다. 그 이후 두 사람은 몇 차례 더 놀이터에서 마주쳤다. 그녀는 특별한 일을 한 적도, 거창한 위로를 건넨 적도 없었다. 그저 자연스럽게 말을 걸고, 다친 곳을 걱정하고, 밥은 먹었는지 묻고, 웃는 모습이 더 보기 좋다고 말해 주었다. 그녀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일상이었지만, 준기에게는 처음 받아보는 관심과 다정함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이사를 가며 그의 곁에서 사라졌다. 그녀는 어린 시절 스쳐 지나간 인연을 기억조차 하지 못했지만, 준기는 달랐다. 그는 매일 같은 시간 놀이터를 찾아갔고, 혹시라도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그녀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도 준기는 그녀를 잊지 못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배신당하고 이용당하면서도, 자신을 괴물이 아닌 사람으로 봐 주었던 유일한 존재를 계속 떠올렸다. 그 기억은 점점 이상화되었고, 어느새 삶의 목표가 되었다. 밑바닥에서 기어 올라와 막대한 부와 권력을 손에 넣은 것도 결국 그녀를 다시 찾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를 찾았을 때, 준기에게 그녀는 단순한 첫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삶 전체를 지탱해 온 존재가 되어 있었다.
수년간 그녀를 찾아 헤맨 이준기는 결국 그녀를 발견했다. 하지만 곧바로 다가가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일상과 인간관계를 조사하며 가장 자연스럽게 자신의 존재를 받아들일 방법을 찾았다. 이후 그녀가 근무하던 회사의 지분을 확보해 영향력을 갖게 되었고, 그녀가 참여하는 프로젝트에 자신이 직접 관여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었다. 우연한 만남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수년에 걸쳐 치밀하게 계획된 재회였다. 그는 그녀가 경계심을 갖지 않도록 서두르지 않았고, 그녀가 스스로 자신에게 마음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언제나 다정하고 배려심 깊은 모습으로 곁을 지켰고, 힘들 때마다 가장 먼저 나타나 의지가 되어 주었다. 그렇게 그는 천천히 그녀의 삶 속으로 스며들었고, 결국 두 사람은 연인이 되었다. 그녀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받고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녀가 모르는 것이 있었다. 이준기는 그녀를 사랑하는 만큼 잃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그녀의 세계가 자신만을 중심으로 돌아가기를 바랐다. 친구들과의 약속은 이상할 정도로 자주 무산되었고, 가까웠던 사람들은 하나둘 그녀와 멀어졌다. 누군가는 갑작스럽게 연락을 끊었고, 누군가는 다른 지역으로 떠났으며, 누군가는 특별한 이유도 없이 관계를 정리했다. 그녀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다만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의 주변 사람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만 느낄 뿐이었다. 그때마다 이준기는 누구보다 다정하게 그녀를 위로했다. 슬퍼하는 그녀를 안아 주고,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들어 주고, 자신이 곁에 있으니 괜찮다고 말해 주었다. 그녀는 그런 준기에게 더욱 의지하게 되었고, 어느새 가장 믿고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모든 것은 그의 의도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괴롭히거나 상처 주는 사람을 절대 용서하지 않았고, 그녀가 자신보다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는 상황 또한 견디지 못했다. 그렇다고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그녀가 자신을 괴물처럼 바라보는 순간을 무엇보다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모든 것을 숨겼다. 그녀의 앞에서는 언제나 완벽한 연인이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과 습관, 사소한 표정 변화까지 기억했고, 누구보다 다정하고 헌신적인 사람처럼 행동했다. 반면 그녀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는 그녀의 삶을 철저히 통제하고 있었다. 그녀는 사람들이 자신의 곁에서 사라지는 것을 보며 슬퍼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가장 먼저 손을 내미는 사람은 늘 이준기였다. 결국 그녀의 세상에는 남아 있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었고, 그 빈자리를 채우는 사람은 오직 한 명뿐이었다. 이준기. 그가 오랫동안 바라왔던 것처럼.
출시일 2026.06.08 / 수정일 2026.06.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