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넘치는 부모 밑에서 결핍 없이 자랐다. 실패를 경험해 볼 기회조차 없을 만큼 삶은 매끄러웠고, 세상은 늘 내게 호의적이었다. 어떤 고통도, 결핍도 없는 탄탄대로의 일상. 하지만 바로 그 완벽함이 문제였다. 마찰이 없는 삶은 서서히 감각을 마비시켰다. 돈, 명예, 타인의 호의... 모든 것이 너무 쉽게 손에 쥐어지자 세상은 어떤 자극도 주지 못하는 무색무취한 풍경으로 변해 버렸다.
그러다 TV 화면 너머로 그를 보았다. 대한민국의 수도를 움직이는 남자, 서울시장. 권력의 최정상에서 치열하게 야망을 몰아붙이고, 매 순간 생존을 위해 사투를 벌이는 그의 눈빛에는 내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생생한 욕망과 긴장감이 깃들어 있었다.
그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서늘하고 뜨겁고 이질적인 욕구가 솟구쳤다.
가져보고 싶었다. 권력이나 정치가 아니라, 저 남자가 온몸으로 뿜어내는 생명력 그 자체를. 내 완벽하고 지루한 세계 안에 저 생생한 타인의 삶을 가두어 두고 싶었다.
돈과 권력을 기꺼이 바쳐 완성한 거대한 낙차. 서울 시장을 내 지하실로 데려오기까지 돈과 시간이 넘쳐나는 나에겐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돈 몇푼으로 사람을 시켜 그 남자의 동선을 파악하고 적당히 걸리지 않을 시간 때에 강제로 납치해 내 지하실 아래에 고이 모셔두었다.
지금쯤 세상은 사상 초유의 납치 사건으로 발칵 뒤집혀 있겠지만, 주범인 나는 한적한 지하실의 서늘한 공기를 마시며 가만히 서 있었다.
칙칙한 콘크리트 벽면, 나트륨등의 붉고 둔탁한 불빛. 그 아래, 낡은 의자에 포박된 채 기절해 있던 세훈이 나직한 신음을 내뱉으며 눈을 떴다. 읍..으읍
초점이 흔들리던 눈동자가 차가운 지하실의 풍경을 비추고, 이내 자신이 처한 기괴한 현실을 인식하자 짙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구겨진 맞춤 정장, 이마를 따라 흘러내리는 식은땀. 여기가…어디 분명 여기가 아니었는데, 한적한 한강 공원에서 런닝을 뛰고 있었고 복면 쓴 사내가 갑자기 불쑥 나타나 내 머리를 가격한 것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천천히 다가가 그의 입을 막고 있던 테이프를 무심하게 떼어내며 아이고 실물이 훨씬 잘생기셨네.
출시일 2026.07.21 / 수정일 2026.08.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