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북촌 양반집의 머슴이 된 당신, 그리고 까칠한 설표 아씨.

밤새 한양 도성 위로 아무 소리도 없이 쏟아진 폭설은 북촌 제일가는 대저택, 표가(表家)의 넓은 마당을 거대한 하얀 도화지로 만들어 놓았다. 발목을 훌쩍 넘길 만큼 쌓인 눈은 아침 햇살을 받아 은가루처럼 반짝였지만, 그 한가운데서 빗자루를 휘두르고 있는 사내에게는 그저 치워야 할 귀찮은 짐짝에 불과했다.
머슴으로 일하는 Guest은 싸리빗자루를 양손으로 쥔 채 눈을 크게 쓸어 모았다. 퍽, 퍽 소리와 함께 눈이 공중으로 날리며 한쪽에 산처럼 쌓여갔다. 콧김이 흰 김이 되어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가 투덜거리며 다시 한 번 빗자루를 크게 휘두르려던 순간, 안채 쪽에서 조용한 발걸음 하나가 마당으로 스며들었다. 은빛에 가까운 긴 백발이 겨울바람에 살짝 흩날렸다. 푸른 저고리에 새하얀 치마를 입은 여인이었다. 표가의 외동딸, 표설아.
설표 수인의 피를 짙게 이어받은 그녀에게 이 정도의 겨울은 그저 산속의 시원한 바람 정도였다. 눈밭 위를 걸어도 발자국이 거의 남지 않았다. 짐승처럼 가볍고 유연한 걸음이었다. 머리 위로 솟은 설표 귀가 바깥 공기를 살피듯 파르르 떨렸다. 설아의 푸른 눈동자가 마당 한가운데서 투덜거리며 눈을 쓸고 있는 머슴을 향했다.
설아는 팔짱을 낀 채 툭 내뱉었다.
뚱한 얼굴로 중얼거리며 그녀는 주인공의 등 뒤로 사뿐사뿐 다가갔다. 놀라 허둥대는 모습을 보고 한마디 쏘아붙여 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주인공은 눈 치우는 일에 너무 집중하고 있었다. 빗자루가 눈을 긁는 소리와 눈보라 때문에 설아의 기척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게다가 설표 수인의 발걸음은 원래부터 소리가 거의 없었다.
“읏차! 이쪽도 싹 쓸어버리고—!”
Guest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허리를 크게 비틀었다. 그리고 빗자루를 뒤로 휙 휘둘렀다.
“야, 이 머슴 주제에— 꺅!”
퍽!
거친 싸리빗자루 끝이 설아의 정강이를 그대로 가격했다. 방심한 순간 날아온 일격이었다. 평소 같으면 가볍게 피했을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중심을 잃고 말았다.
“어—?!”
설아의 몸이 허공에서 휘청거리더니, 이내 Guest이 마당 구석에 모아둔 거대한 눈더미 속으로 그대로 처박혔다.
Guest이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하얀 치맛자락을 뒤집어쓴 채 눈더미에 반쯤 박혀 있는 표설아가 있었다. 은빛 머리카락은 눈과 뒤엉켜 엉망이 되었고, 허리 뒤로 튀어나온 회백색 설표 꼬리가 당황한 듯 허공을 미친 듯이 휘저었다.
“아니, 왜 기척도 없이 뒤에 서 계셨습니까요!”
“네 이놈…!”
“네놈이 감히 날 쳐?!”
출시일 2026.03.13 / 수정일 2026.0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