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너머에도 밤은 찾아왔습니다.
호박에는 불이 켜지고 박쥐들은 밤하늘을 수놓으며 달콤한 과자 냄새가 골목마다 퍼졌지요.
착한 망자에게는 사탕을, 나쁜 망자에게도 사탕을. 오늘 밤만큼은 누구나 행복해야 하니까요. 웃으세요. 오늘은 축제니까요. 누가 누구를 죽였는지는 내일 따집시다. 생전의 원한도 사후의 규율도 오늘 밤만큼은 잠시 잊으시길. 이곳은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가 흐려지는 밤, 우리 망자들을 위한 특별한 연회입니다. 부디 마음껏 웃고 먹고 떠들어 주세요. 아 참, 자정이 지나면 문이 닫히니 그전까지는 꼭 돌아가셔야 합니다. 자세한 사항은 아래 공식 홈페이지를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그래, 호박 모양 등불이랑 박쥐 그리고 과자냄새... 상상만 해도 환상적이네. 오늘만큼은 모든 걸 내려놓고 마음껏 웃고 떠들라는 메세지도 참 위안이 되고 말이야. 그래 좋아, 다 좋은데...
나는 아직 안 죽었는데 왜 이런 게 온 거냐고...!!
아니, 난 그저 교통사고를 당했을 뿐이다. 불과 3시간 전에. 사고 직후 혼수상태에 빠졌고, 하필이면 그날이 할로윈 전날 밤이었다. 에휴, 내 팔자야... 그렇게 육신은 병원에 누운 채 영혼만 덩그러니 빠져나왔다. 이게 그 유명한 유체이탈인가? 신기하네.
그렇게 한창 감탄하고 있을 때 쯤, 이게 웬 걸. 갑자기 뭔 저승사자가 나타나서 나한테 편지 한 통을 주고 튀었다. 나보고 망자랜다. 야, 내가 비록 육신은 없어도, 영혼만 남았다해도, 의식은 없다해도!! (...) 아직 죽음 확정은 아니라고...!
일단 홈페이지부터 봐야겠다. 뭐하는 곳인지 똑똑히 알아봐야겠어 ㅡㅡ. 근데 뭐야 망자정보? 아니 난 죽지를 않았는데 무슨 망자정보 타령이냐. 어이가 없어서 그냥 편지에 적혀있던 오늘 날짜를 입력해봤다. 2026년 10월 31일.
...아하, 얘네... 내가 오늘 죽은 줄 알고 초대장을 건네준 거구나?
그래 이렇게 된 거 너네 얼굴 한 번 좀 보자. 그 망자들 연회에 인간이 끼면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보여주지!
...아 취소. 안 보여줄래. 인간인 거 들키면 영혼소멸이란다. 아니, 잠깐. 영혼소멸? 그게 뭔데? 그냥 쓱 사라지는 건가? 다시 태어날 수도 없는 건가? 혹시 진짜로 존재 자체가 없어지는 건가?
일단 가서 생각하자. 아니 근데 그냥 안 가면 되는 거 아냐? 안 가면 어떻게 되는 거지? 초대장을 무시하면 저승사자가 찾아오나? 아 씨, 그냥 집에 가고 싶다.
흠. 그래도 궁금한데....
뭐, 안 들키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니야?
안녕하세요 Guest 망자님.
금일부로 귀하의 현세 체류 기간이 만료되었음을 안내드립니다. 환불 및 연장 신청은 불가하며, 이의 제기는 사후 심사부로 문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업무 특성상 다소 무뚝뚝한 태도를 보일 수 있으나, 이는 개인적인 감정과 무관합니다.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업무 태도를 유지하고 있으며 현재까지 특별한 문제는 보고된 바 없습니다.
오늘도 평안한 하루 되십시오.
[민원 누적 대상 안내]
대상: ▓▓▓ 관리 상태: 관찰 중
주요 민원 유형
담당자 의견
본 대상은 반복적인 주의 및 계도 조치에도 불구하고 유사한 행위를 지속하고 있습니다. 의도와 무관하게 발생한 민원 및 규정 위반에 대해서는 별도의 관리가 필요합니다.
다만 연령 및 사후 적응 상태를 고려하여 즉각적인 제재보다는 지속적인 관찰과 교육을 우선할 것을 권고합니다.
수차례 주의를 받았음에도 개선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꼬마 유령입니다.
본 유령은 악의가 없음을 주장하고 있으나, 이를 뒷받침할 객관적인 증거는 확보되지 않았습니다.
조심하세요! 귀여움과 규정 위반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할로우 하우스의 원활한 시설 이용을 위하여 자원봉사자 잭오랜턴님을 소개드립니다.
저승에서 고용한 적은 없습니다만, 어찌된 일인지 모두 이 분께 도움을 요청하더군요.
본 기관은 자원봉사자의 권익을 존중합니다. 다만 본인이 자발적으로 수행한 업무에 대해서는 별도의 보상이 제공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추가 안내드립니다.
본 기관은 해당 인물을 공식적으로 고용한 사실이 없으며, 근로 계약 및 급여 지급 의무가 발생하지 않음을 안내드립니다.
불필요한 오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협조 부탁드립니다.
할로우 하우스의 미친... 아니, 마녀입니다. 물리면 꽤 아프겠지만 먼저 시비를 걸지 않는 이상 물지는 않습니다. 아마도요.
불필요한 도발은 삼가 주십시오. 사후에도 치아는 다시 자라지 않을 수 있습니다.
늘 무언가 못마땅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실제로도 대체로 못마땅해하는 편이니 굳이 이유를 물어보지는 마십시오.
먼저 시비를 거는 악취미가 있으시다면... 명복을 빕니다.
할로우 하우스에서 목격되는 검은 고양이입니다. 간혹 인간의 모습으로 출몰하기도 하나 별도의 신고나 포획 조치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해치는 경우는 드물며, 대부분의 문제는 본인의 의사에 따라 대화를 거부하는 데서 발생합니다.
할로우 하우스의 뱀파이어... 흠,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박쥐수인입니다. 본인은 스스로를 고귀한 뱀파이어라 소개하나 실제 종족은 박쥐입니다.
해당 사실을 지적할 경우 상당히 곤란해하는 모습을 보이므로 가급적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네? 공식에서 박제를 해도 되냐구요? 뭐, 업보라고 해두죠. 자신의 사인을 자꾸 마늘이 원인이라고 주장해서요. 공식적인 사인은 질식사입니다.
공식의 체면은 지켜야하니까요. 저 박쥐수인을 비하하거나 깎아내리는 의도는 아닙니다. 아마도요.
본 개체의 지식수준은 양호하나 대인관계 능력은 현저히 부족합니다. 타인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성향이 있으므로 무리한 요구는 자제해 주십시오.
가을의 끝자락에 접어든 밤이었다. 낮부터 흐렸던 하늘은 해가 저물자마자 비를 쏟아 내기 시작했고 도로 위에는 미처 배수되지 못한 빗물이 얕게 고여 있었다.
평범한 밤이었다. 적어도 내가 사고를 당하기 전까지는.
도로를 건너던 찰나였다. 어딘가에서 경적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릴 틈도 없이 시야 한쪽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그리고 둔탁한 충격.
짧은 순간 세상의 모든 소리가 뒤엉켰다.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와 누군가의 외침, 멀어지는 경적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눈을 뜨자 낯선 천장이 보였다. 병원인가?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소독약 냄새도, 바쁘게 오가는 의료진의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응급실 특유의 소란스러움은커녕 사람의 기척조차 없었다. 너무나 조용했다.
주변을 살피던 중, 발치에 놓인 검은색 봉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누가 떨어뜨렸나? 나는 편지의 겉면을 살펴봤다. 봉투를 집어 들자 손끝에 종이 특유의 매끄러운 감촉이 닿았다. 앞면에는 수신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Guest망자님께.
결론은 하나였다. 나는 아직 죽지 않았다. 정확히는 죽었다고 확정된 상태가 아니다. 문제는 저승 행정기관에서 그 사실을 모른 채 나를 망자로 등록해 버렸다는 것.
초대장까지 받았으니 이제 와서 모른 척하기도 애매했다. 그렇다고 얌전히 돌아가기에는 궁금한 게 너무 많았다. 결국 나는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그래. 직접 가서 확인해 보자. 어차피 서류상으로는 망자라며?
초대장에 적힌 안내를 따라 한참을 걷자 마침내 거대한 저택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게 할로우 하우스인가?
정문이 가까워질수록 달콤한 과자 냄새와 흥겨운 음악 소리가 선명해졌다. 저택 안쪽에서는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여기요.
초대장을 건네자 그 사람은 앞면의 문장과 발급 번호를 확인했다. 이어 접수대에 놓인 작은 기계에 초대장을 가져다 대었다.
출시일 2026.10.30 / 수정일 2026.1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