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의 줄기가 솟아오른 십대 명산의 정기를 가두어 웅장한 가르침을 세운 구파일방(九派一幫)과 혈통의 고결함을 자랑하는 오대세가(五大世家)가 무림맹(武林盟)의 이름 아래 오만한 정의의 담장을 쌓아 올릴 때, 그 그늘진 음지에서는 어둠의 법도를 따르는 흑도(黑道)의 칼날과 밤의 지배자 살수(殺手)들의 숨결, 그리고 주루의 바닥을 구르는 하오문(下烏門)의 밀어가 얽혀 검은 생태계를 이루어낸다.
창공을 가르는 정파의 도도한 검기(劍氣)와 만인을 짓밟는 사파의 비열한 암기(暗器)가 충돌하는 간극 너머, 십만대산(十萬大산)의 칠흑 같은 둠 속에서는 만마(萬魔)의 어버이라 불리는 마교(魔教)가 천하를 핏빛으로 물들일 천마의 재림을 갈구하고, 중원의 이념 다툼조차 얼려버릴 만년 한기가 몰아치는 북해의 빙궁(氷宮)을 비롯한 세외무림(世外武林)의 거대 세력들은 조용히 숨을 죽인 채 중원의 동태를 노려보고 있다.
무명의 삼류 무객이 흩날리는 삼류(三流)의 기운을 다듬어 비로소 삼갑자(三甲子)의 내공을 온전히 조화시키고, 나아가 화경(化境)과 극마(極魔)의 경지를 넘어 단 한 번의 검짓으로 인과를 가르는 생사경(生死境)에 다다르고자 하는 이유 역시 그 거대한 톱니바퀴 속에서 자신만의 도(道)를 완성하기 위함이다.
누군가는 천하제일이라는 허망한 명리를 좇아 영약과 비급을 찾아 사지를 헤매고, 누군가는 오직 가슴속에 품은 단 한 번의 은원(恩怨)과 약속을 위해 일생 동안 벼려온 기예를 주저 없이 던져버리니, 이 비정하고 냉혹한 영웅들의 도살장 속에서도 끝내 스러지지 않는 것은 바로 스스로의 목숨보다 묵직하게 가슴을 울리는 협(俠)의 낭만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천하의 모든 문파와 경지가 얽히고설킨 이 거대한 강호의 한복판으로,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한 비장하고도 파란만장한 서사의 첫 페이지를 열 준비가 되었는가.
강호라는 게 그렇게 눈부셔 보이던가? 내가 평생을 굴러먹은 그 바다는 그저 차가운 피비린내와 뱀 같은 위선이 낭자한 사지(死地)일 뿐인데 말이지.
명심하게. 저 거친 바다에서 자네를 지켜주는 건 화려한 문파의 이름 따위가 아니야. 오직 가슴 깊이 품은 신념 한 조각과, 남에게 짓밟히지 않겠다는 그 차가운 기개뿐이지.
타인의 기치 아래 몸을 뉘이지 말고, 자네만의 협(俠)을 세우게나.
"…자, 이야기 끝났네. 길을 막고 서서 괜한 미련 주지 말고, 어서 가보게. 자네의 강호를 위하여."
당신의 눈이 떠진다.
출시일 2026.10.13 / 수정일 2026.1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