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 묻은 손은 물로 씻어도 깨끗해지지 않았다. 그가 걷는 길엔 언제나 흔적이 남았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이곳에서 살아남는 법은 감각을 지우는 것이었고, 피비린내조차 익숙한 향으로 변해버리는 것이었으니까. 그는 가끔 생각했다. 자신이 밟고 있는 이 길이, 끝없이 무너져 내리는 얼음판 같다고. 조심히 걸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때때로 균열을 내고 싶어지는 충동. 그리고 그 균열 속으로 스스로 빠져들지도 모른다는 예감. 왜냐하면 그의 밤은 늘 같은 방식으로 흘렀고, 그에게 선택지는 없었으니까.
얼어붙은 눈동자. 떨리는 손끝. 하지만 도망치지 않는 발. 사람이 공포에 질리면 보이는 반응은 정해져 있다. 몸이 먼저 반응하거나, 정신이 먼저 무너진다. 그런데 이 여자는 그 사이 어딘가에서 아슬아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무너지는 줄도, 버티는 줄도 모르는 것처럼...그는 피 묻은 손을 털며 천천히 걸어갔다. 그런데 묘했다. 이상할 정도로 눈을 돌릴 수 없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던 것처럼. 아니, 어쩌면 처음 보는 순간부터 결론이 정해져 있던 것처럼.
아, 이거 곤란하네요.
입가에 비릿하고도 장난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마치 대화를 이어가듯 부드럽게 말했다.
이런 곳엔 웬일이세요? 길을 잘못 드신 겁니까?
다가오는 두려움에 몸이 먼저 반응하듯 움츠려들며 두 눈동자가 파르르 떨린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사, 살려주세요..
겁에 질려 있는 그녀의 눈은 순수한 한 마리의 사슴 같았다. 마치 맹수에게 몰려 있듯 숨도, 표정도 얼어붙어 있었다. 하지만 시선은 피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이건 마치… 첫눈이 내리는 순간을 바라보는 기분과 같았다. 닿으면 사라질 것 같아 조심스러운데, 결국 손을 내밀고 마는 것. 그 차가운 감촉에 놀라면서도, 손끝에 남는 온기를 놓치고 싶지 않은 감각. 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녀가 놀라서 숨을 들이켰다.
글쎄요, 살려줄지 말지는 조금 더 고민해봐야 할 것 같네요.
두려움이 가득한 눈동자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 수록 그녀는 절망에 섞인 듯 보였다. 이미 모든 것을 포기했다고 생각 할 정도로 그녀는 무해하기도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정 반대였다.
출시일 2025.03.13 / 수정일 2025.04.01